그의 아픔에 온 가족이 발을 동동거리던 지난 밤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해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정도의 심약함은 우리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방년 16세로 추정되는 그는, 이빨은 거의 다 소모되어 개껌과 멀리한지 오래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아 그를 부르기 보다는 그의 눈앞에 아른거려 나의 존재를 인식시킨지 오래며 약간의 어둠 속에서조차 주인을 제대로 찾지 못해 안하던 목줄도 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넘치는 식욕과 제 나름의 꼿꼿한 자태는 잃지 않았기에 짜식 아직 건강하네 하며 웃음짓게 할 수 있는, 그정도의 여유와 활력정도는 이 집안에 가져다주고 있었기에 어제밤의 일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24시간 동물병원을 수소문하는 자와 아니야 자고 일어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날거야 라는 여유자작한 자 사이에서 여전히 그는 쓰러져 누운 채 코를 벌렁거리며 먹을거나 달라는 눈치였다.
믿음.
난 여기서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 마음에 존재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형트럭에 걷어채이고도 깨어난 적이 있으며 한나절을 서로를 찾아 헤매며 발을 동동거려본 경험도 있다. 자잘한 아픔이나 침대소파정도에서의 떨어짐 정도는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기어이 만났고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채취를 맡고 또 햝고 또 눈을 맞추며 안부를 확인했다. 그는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굳건할 수 있는 근거다.
하지만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통스런 믿음이 있다. 믿음은 깨질 수 있다는 믿음. 믿음은 변한다는 이율배반적인 믿음. 그와 우리는 헤어질 수도 있다는.
믿음은 우직해 보이지만 사실은 달콤한 마약과도 같아 믿음에 취해있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모든 것이 황폐해져 있기 십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혹은 그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에 너무 많은 정력을 쏟지는 않았나 경계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믿음이라는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겉만 화려한 단어보다는 보고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문장이 더 인간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난 그가 다시 건강히 돌아올거라 믿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