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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쏭 Jul 19. 2024

SSKK 없는 삶

이따비 상사편

수평이 뭐야?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후 가장 적응이 오래 걸린 부분은 내 위에 몇 명의 상사가 없다는 점이었다. 창업자가 대표로 있긴 하지만, 그와의 관계가 위아래로 구분되기 어렵다. 조직 규모가 커져 어느 정도 위계가 생기기 전까지, 시리즈 A 단계의 스타트업에서는 창업자 또는 창업팀과 수평적인 관계로 일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이 '동료'라는 이름으로 함께 일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스타트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가 많다.

내가 18년 동안 일하면서 익숙했던 환경은 상사에게 업무 지시를 받는 것이었다. 모든 일은 위에서 결정되고 나는 그 결정된 과업을 실행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그 방향으로 결정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최근 많은 대기업이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수평적 조직문화를 추구하지만, 실제로 의사결정을 Bottom-up 방식으로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기업은 조직이 크기 때문에 여러 명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다 보면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조직이 클수록 수직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더 타당하고 효율적일 수 있다.

나는 상사의 말을 잘 듣는 예스맨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른말을 많이 하거나 잘 대드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자유롭고 수평적이며 의사결정이 빠른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것이 쉬울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생각보다 수평적으로 일하는 데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일하는 것이 수평적으로 일하는 것인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SSKK가 없다?


스타트업 임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1/N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에도 참여할 기회를 얻으며, 대표와 업무를 나누고 나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온다. 그러나 출근 첫날부터 나는 멘붕에 빠졌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님, 이제 저는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까요?"

"크레쏭, 지금 우리 회사에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일을 시작해 주세요."

"그게 뭘까요?"

"그건 크레쏭이 정하셔야죠! 양육자를 만족시키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뭘지 생각해 보시고 저랑 다시 이야기할까요?"

이 대화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준 것 같지만, 동시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을 안겨주었다. 나는 예전처럼 Action Item을 정할 수 없었다. 생각해야 하는 범위도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애써 태연해 보이고자 했다. 그래서 아주 큰 소리로 허허허 웃었지만 동시에 나의 머릿속은 수많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내가 할 일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JD가 없다는 말이네? 해야 할 업무 목표는? 그것도 내가 정하는 건가? 이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백지수표를 받은 것과도 같지만, 다시 말하면 어디에도 쓸 수 없는 종이를 받은 느낌과도 같았다. 호기롭게 생각해 보고 만나자고 했지만, 내가 더 당황한 건 예전 같으면 내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 Action Item 1,2,3을 정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뭘 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생각해야 하는 범위도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졌기 때문이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정말 다른 세상에 왔구나!


나도 결국 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는 걸 잘했던 사람이구나!



상사는 죽었다.


대기업에서 일잘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상사가 원하는 일을 상사가 원하는 스타일로 그의 시간프레임에 맞춰서 한다. 이게 말이 쉽지 이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떤 업무를 빠르고 정확하게 실행을 잘하는데 일하는 근육이 최적화되어 있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나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걸로... 


그래서 상사가 없는 스타트업의 Day1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표가 제발 좀 나에게 일을 시켰으며 좋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와 제품에 적응하기 위해 첫 일주일을 보냈는데 각 종 회의를 참석하면서 더 큰 물음표 하나가 더 생겼다. 왜 대표가 그냥 결정하지 않지? 00님 이렇게 하세요!라고 이야기 하면 3분 안에 끝날 일인데 모두의 의견을 물어보고 충분히 들어보고 더 나은 대안이 없는지 확인하는 게 이해가 잘 가질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왜 업무지시를 Top-down으로 하지 않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심플하고,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또한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스타트업은 그래야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어요." 이 짧은 한마디에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는 리스크가 많은 환경에서 일해요. 그래서 제가 모든 의사결정을 하는 게 더 큰 리스크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그렇게 일을 해 나가는 게 우리의 문화라고 생각해서 전 시간이 조금 걸려도 Bottom-up의 문화를 지키고 싶어요. 그게 결국 옳은 의사결정을 해주리라고 믿어요."


그때 나의 상사는 죽었다. 



어젠다 세팅


나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 없다면, 스스로 나에게 일을 시켜야 한다.


나는 내가 할 일을 스스로 찾고 일의 범위를 정하고 실행 전략을 세우는 일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걸음마부터 다시 배우는 느낌이었지만,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 느끼는 성취감도 꽤 괜찮았다. 스스로 할 일을 정의하고 범위를 그리고 목표를 설정하는 일, 우리는 그걸 다른 말로 Agenda Setting이라 부른다.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려면 어젠다를 세팅하는 역량이 정말 필요하다. 그게 뭐 어려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을 그렇게 배우지 못한 대기업 출신이라면, 그 일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도 그게 나에게 그렇게 큰 부담이 될지 몰랐다. 운이 좋게 프로젝트를 리드하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조금 쉽게 시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은 필요하지만 시키는 일이 아니라 일을 찾아서 하는 근육을 만드는데 짧게는 1개월, 길게는 3개월 정도 걸린다. 만약 이 기간 이상이 걸린다면 심각하게 내가 이 스타트업 환경에서 일하는게 맞는지 생각해 봐야한다. 그래서 조금 더 단계가 성숙한 회사 (내가 어젠다 세팅을 안해도 되는 곳)로 이직을 하거나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길 권한다. 왜냐하면 이게 기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주니어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려주는 회사는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잘 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주도성'이라는 DNA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어젠다 세팅하는 역량이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발현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가장 중요하건 두려움을 없애는 일이다. 내가 이 걸 결정해도 될까? 오버 아닌가? 이 방향이 맞나?라는 생각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면, 물어보면 된다. 내가 이걸 물어보는 게 창피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용기 한 스푼 정도만 필요하다. 


여러분, SSKK가 없는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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