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라잉제이 Jan 28. 2020

외항사 승무원은 0개 국어를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날의 목적지는 한국이었다. 터뷸런스 때문에 기체가 요동을 치고 있었기에 항사의 한국인 승무원 P 영어 기내방송이 끝난 후 재빨리 한국어 방송을 해야만 했다. 손 닿는 거리에 한국어 기내 방송문이 없던 터라 그녀는 즉흥적으로 MIC를 잡고 기억에 의존한 채 입을 뗐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재 우리 비행기는 난기류의 영향으로 기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화장실 사용을 금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셔서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난기류는 ~충 20분 정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P는 방송을 마치고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응. 대충 아니고 대략.






보통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게 되면 영어가 빠른 속도로 향상될 것이라 생각한다. 매일 외국인 동료와 승객들을 만나 영어를 쓰니까. 비교적 합리적인 추론처 들리지만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일할 때는 주야장천 영어 사용하지만, 비행이 끝나고 나서는  한국어만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의 기대와는 , 느 순간 영어도 안되고 한국어도 안 되는 0개 국어 상황을 마주게 된다. 이런 언어 퇴행 현상은 한국 비행에서 한국 승객들을 마주했을 때 그 바닥이 실히 드러나곤 했다.



한국 비행은 한 달에 한번 정도할당받았지만, 길어지는 경우 세 달기도 했다. 한국 비행 텀이 길어질수록 기내에서 한국말로 승객을 응대하는 일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오랜만의 비행일수록 쉬운 단어가 나지 않아 로딩 시간이 길어다. 단어가 늦게라도 생각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기내의 안전 점검을 하다가 빈자리의 담요를 치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승객에게  '저한테  담요를 네주시겠습니까'라고 요청해야 하는 순간이었는데 '담요'라는 단어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담요를 가리키면서 어버버 하다 결국에는 '저것을 '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어떤 날은 좌석의 '팔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이것 내려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한국 비행은 놀랍도록 프로답지 않은 단어 선택의 연속이었다. 모든 것이 이것과 저것으로 통하는 세상이었달까.




그뿐이겠는가. 어떤 경우에는 한국어를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쑥 영어가 튀어나왔다. 식사 시간에 그런 실수가 잦았다. 승객에게 어떤 메뉴를 선택하실 건지 여쭙는 상황이었다.



치킨으로 드릴까요? 아니면 피쉬로 드릴까요?


황급히 자체 통역을 해서 다시 질문을 한다.



닭고기로 드릴까요? 아니면 생선으로 드릴까요?



훗날 전해 들은 이야기이지만 어떤 승무원은 생선 대신 '물고기'라는 단어를 썼다고 한다. 오 마이 갓




물론 반대의 상황도 있었다. 한 달 정도 되는 긴 휴가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하면 영어가 그렇게 생소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영어를 쓰며 일했는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어떤 모범생 승무원이 휴가기간에 영어 스피킹 연습을 할까. 긴 휴가 동안 영어는 완전히 잊고 한국어만 줄기차게 써댄 탓에 언어의 불균형 상태를 마주하기도 했다. 영어 결핍. 한국어 과잉.



외국인 동료한테 Umm/wait/I mean이라고 시간을 벌어 소통하는 경우가 많아지곤 했다. 기다려봐. 나 버퍼링 중이다. 또 일하다 보면  한국어를 버벅거리거나 다시 반대의 경우로 돌아오거나 했다.






나는 가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한국 비행을 할 때면 쉬운 단어조차 기억이 나질 않아 옹알이를 하는데,  급박한 상황에서는 어떨까. 요나 팔걸이는 중요한 것들이 아니니까 생각이 안나도 그만이다. 이것저것으로 하면 되니까. 버벅거려도 괜찮다. 하지만 비상상황은 르다. 외항사는 한국어로 따로 교육을 받지 않으므로 어떤 식으로 구호를 외치는지 한국어로 연습해보고 싶었다.




장 기본적인 상 탈출시 승무원들의 영어 구호는 아래와 같다. 대한 목소리 데시벨높여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Seatbets OFF!
Leave everything!
Come this way!
Jump and slide!



그래서 국내 항공사 승무원 A에게 물었다. 그녀의 항공비상 탈출시 승객에게 어떤 식으로 소리치냐고 말이다.  

녀는 아무리 승객을 왕처럼 생각하는 국내 항공사여도 위급상황에는 반말을 한다고 답했다. 대충 이런 느낌이 아닐까.



안전벨트 풀러!
짐은 다 내려놔!
이쪽 문으로 와!
점프해서 뛰어내려!



히딩크 감독은 한국어의 존댓말이 구경기에서 만큼은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축구장에서는 선후배 상관없이 무조건 반말로만 소통할 것을 명했다. 신속히 돌아가야 하는 경기중에 < 명보 선배님, 이쪽으로 패스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인 것 같기는 하다.

  


승객에게 반말한다고, 버르장머리 없다고 혼날 것 같지만, 비상시 승무원이 소리를 지르며 반말을 해도 노여워 마시길 바란다. 비상상황에서는 무조건 뜻이 명확히 전달될 수 있도록 간결하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항사에 타실 한국 승객분들을 위해서 집에서 얌전히 반말 한국어 구호를 연습해 보던 0개 국어 구사자 승무원도 있다고 기억해주시면 더욱 고마울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승무원도 터뷸런스가 무섭습니다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