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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제이 Nov 21. 2019

서른살에 외국항공사 승무원이 되다

되면 될 팔자. 안되면 안 될 팔자.

처음 항공사 합격하는 데는 정확히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영어회화도 부족했고, 치아에는 교정기가 부착돼 있었고, 미소도 어색했다. 승무원 면접에서는 계속 웃고 있어야 하기에 미소는 최대한 자연스러워야만 한다. 지만 우습게도 내 별명은 썩은 미소였다. 어야 할 산이 높았다.


매일같이 스터디 모임을 하러 신촌으로  출근하고, 볼펜을 입에 물고 침을 질질 흘리며 자연스럽게 웃는 연습을 했다. 개구리. 치즈. 김치.  온갖 단어 다 갖다 붙이며 허구한 날 입꼬리를 올렸다. 안면근육에 경련이 올 때까지 열심히 했다.  '하와유'에 '아임 파인땡큐 앤듀'만 줄창 외쳐대던 나는, 부족한 회화를 위해 문장을 달달 외우고 문법을 공부했다. 학연수 경험도 없, 평소 영어 보기를 돌같이 하던 나로서는 무조건 들이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출발한 나의 외국 항공사 승무원 도전기는 2년 만에 꿈에 그리던 항공사에 합격함으로 끝나는 듯했다. 




지만 내 팔자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던 건지 반년 뒤에 입사가 취소되고 말았다. 자동으로 취소된 건 아니었다. 당시 그 항공사가 시기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기존 직원들도 무급휴가를 가고, 모든 프로세스 자체가 지연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그 와중에 신입사원 채용 프로세스가 진행될 리 없었다. 입사일까지 받아 놓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은 지속되었다. 드디어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최종면접을 다시 보자며 연락이 왔다.



그 당시 내가 다녔던 승무원학원 선생님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셨다.


네 팔다리 제대로 붙어있나
그거 보려고 다시 치르는 면접이니까
쫄지 말고 그냥 편하게 보다 와!
이미 붙었잖아. 그냥  확인용일 뿐이야.



나는 그 소중하고도 쉬운 면접을 국밥 먹듯 제대로, 시원하고도 완벽히 말아먹고 떨어졌다.  나와 함께 최종 면접을 다시 보았던 친구는 통과해서 몇 달 뒤 입사를 위한 출국을 했다. 이런 면접에서조차 떨어진 나 어떤 의미로 참 대단했다.



손안에 들어온 행운을 힘주어 쥐고 있지 못하고, 손가락을 쫙 펴서 날려버린 자신에 대한 실망과 경멸로 몇 달을 힘들게 보냈다. 거기에 당시 남자 친구와도 사소한 다툼으로 어이없게 헤어 저절로 '마음고생 다이어트'가 시작되었다.  마다 청승맞게 숨죽이면서 베갯잇을 적시 잠는 날이 많았다. 세상에서 내가 최고로 불행한 것 같고, 나같이 멍청한 인간이 없는 것 같고, 나처럼 일이 안 풀리는 인간이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나에게 연애하다 이별하는 거 누구나 다 겪는 흔한 일이고, 입사 취소 그까짓 거 별거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다른데 또 보면 되지. 래. 이별 따윈 견딜 수 있었다. 근데 입사 취소는 그게 아니었다. 승무원 채용은 자주 있지도 않을뿐더러 이 항공사에 합격했다해도 다른 항공사의 면접은 1차통과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나는 승무원이라는 세 글자에 너무나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가 태어나서 무언가를 정말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느낀 것도 승무원이 처음이었다. 그 결과  준비기간이 길어질수록  승무원을 향한 연한 동경 집착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승무원을 못 해보고 죽으면
죽을 때 눈을 못 감을 것 같아.
눈감고 죽으려고 승무원 한번 해봐야겠어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승무원이 그렇게 하고 싶냐며 물었을 때의 나의 답이었다. 친구는 나에게 승무원이 되는 것이 그토록 비장해야만 될 일이야라고 되 물었고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십 년 전의 나에겐 영혼을 팔아서라도 하고 싶은 직업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항공업계 불황 때문에 채용도 거의 지 않았다. 겸사겸사 새로운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단돈 백만 원과 워킹홀리데이 비자만 가지고  친한 친구 한 명과 브리즈번으로 떠났다. 친구는 나와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브리즈번에 지인도 다. 그 덕에 도착 후 이틀 친구의 친한 언니네서 숙식을 해결했다. 계속 그곳에신세를 질 순 없었기에 우리는 다른 길을 찾아봐야 했다. 친구는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며 파 농장으로 가겠다고 했고 나는 시티에 숙소를 잡고 일정이 허락하는 대로 틈틈이 면접을 보기로 계획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런 쌔끈한 캠핑카 아니고!


하지만 우리 둘은 타국에서 삼일 만에 헤어지는 것이 몹시 아쉬웠고, 상의 끝에 내가 친구의 파 농장으로 따라가서 며칠 지내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농장의 일꾼들은 보통 일반 주택이 아니라 카라반이라 불리는 트럭으로 만든 집에 살곤 했다. 공동체 생활의 재미도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가격이 매우 저렴했다. 하루 숙박비가 만원 꼴이었으니 돈이 궁한 젊은 청년들에게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친구는 호기롭게 본인은 전에도 이런 곳에 머무른 적이 있다며, 가장 넓고 싼 카라반을 구해여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몇 군데를 샅샅이 뒤지다 앞마당에 비닐이 쳐져있고 꽤 큰 사이즈의 가격까지 합리적인 한 곳을 찾아냈다. 친구는 그렇게 기세 등등해하며 이렇게 비닐이 쳐져 있으면 비 올 때 나와서 바비큐를 해 먹어도 좋고 어쩌고 연설을 하면서 뿌듯해했다. 그 순간 나는 친구의 등 너머로 잽싸게 지나가는  더러운 갈색에 뚱뚱하기까지 한 쥐새끼를 목격했다. 내가 찢어질듯한 소리를 지르자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내쪽으로 냅다 붙었다. 아. 아무리 싸고 넓고 하면 뭐해. 이름도 모르는 쥐새끼랑 동거하고 싶냐.라고 하자 친구는 하얗게 질려서 그 카라반을 뛰쳐나왔다.




결국 그녀는 작은 사이즈에 앞마당이 없고 곰팡이 내음이 코를 찌르는 저렴한 가격의 카라반에 돈을 지불했다. 호주는 365일 더운 줄 알았던, 무식자였던 나는 8월의 매서운 호주 찬바람에 이를 딱딱거리며 잠을 청했다. 매트리스는 어찌나 허접하고, 끽끽 대며 소리를 내는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마치 장자의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 거지 모를 정도의 램수면 상태를 오락가락했달까.




다음날 친구는 새벽같이 농장에 파를 으러 갔고, 일당으로 받아온 50불을 펄럭이며 자기 별명이 파신(Leek of God)이었다고 자랑을 했다.



그래. 좋겠다. 아무튼 나는 주말 되면 바로 브리즈번 시티로 나가 살란다.



곰팡이와 돼지 같던 쥐새끼를 뒤로한 채 나는 며칠 뒤 시티에 와서 숙소를 구했다. 그리고 자본금 100만 원이 떨어져 가는 시점에 중국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시작했다. 하루하루 간당간당하고 쫄깃하게 연명하던 나는 근근이 항공사 면접을 보았다. 주일을 일해 돈을 벌어 일주일치 집세를 내고 식료품을 샀다. 첫번째 Q 항공사의 면접을 보았다. 2차에서 떨어졌다. 두달 뒤 E 항공사의 면접을 보았다.  내가 최종합격했었던 항공사였다. 1차에서 떨어졌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두달이 다.마지막 면접. E 항공사.

내 인생 통틀어 최고로 슬아슬하고 찌질했던 29.9세에 시 한번 항공사 면접 했다. 호주에 간지 6개월 만에 거둔 쾌거였다. 서른살의 나는 그렇게 승무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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