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는 Snap Shot을 가르치지만 실전은 Time Term이다.
1. 잡상의 발단
어떤 프로젝트로 변호사와 컨퍼런스 콜을 할 때였다. 우리는 특정 안건이 계약서에 들어가도 될지 문의하였다.
"xx년간 일정한 주기로 xx불씩 분할 상환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시점에 따라 리스크가 줄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법무적인 관점에서 볼 때, xx 조건을 해석하면 이는 여전히 리스크로 존재합니다."
우리의 사고에는 시점이(유량, Flow)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변호사는 계약 시점에서의 순간(저량, Stock)을 고려했다. 물론 유량과 저량을 비교할 수 있게 도와주는 개념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재가치(Present Value ; PV)다.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 이 둘은 동등하지 않다. 잡상 하나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컨퍼런스 콜은 잘 마쳤다.)
2. 교과서는 Snap Shot를 가르친다.
법인세 예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이론적으로는 법인세를 대고 난 이후의 수익(법인세 납부 후 이익)이 0보다 크면 투자를 한다. 적어도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가르친다. 만약 법인세가 과세표준에 비례한다면 (즉, %의 형식으로 매겨진다면) 법인세의 인상과 투자의 결정은 상관이 없다.
어떤 기업이 창출한 세전이익 P가 0보다 크다고 가정하자. 이때 비례세인 법인세를 부과하여도 세후 수익은 0보다 크다. 법인세율을 t라고 할 때 세후 수익은 P(1-t)이고 t가 100%를 넘지 않은 이상 P(1-t)>0 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투자 안건 간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유사하다. 현재가치를 쓰느냐 내부수익률(Internal Rate of Return ; IRR)을 쓰느냐에 따라 조금 달라지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미래의 Time Flow를 현시점의 한 숫자로 치환하여 비교를 한다는 방식은 동일하다. 그리고 교과서에서는 현시점에 저량화한 숫자가, 그것을 시점별로 풀어놓은 유량과 동일하다고 얘기한다.
3. 현실은 다르다.
1) 현실은 유량이다.
현실은 다르다.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안건이 얼마나 길게 수익을 가져오고 얼마나 짧게 비용이 드는지가 중요한 판단 잣대다. 당장 당신 PC에 담긴 아무 보고서라도 찾아보라. 향후 xx년간 xxx 억의 수익을 창출하는 프로젝트라는 설명이 나오지 단순히 PV>0이므로 (혹은 IRR> xx% 이상이므로) 투자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기술하지 않는다. 물론 PV나 IRR을 언급한다. 하지만 미래의 기간과 PV, IRR을 함께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둘은 동등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나아가 PV나 IRR이 되레 보조적인 역할만 할 뿐이라는 느낌도 받을 것이다.
왜 그런지 따지기 전에 현실과 이론이 다른 또 하나를 더 짚어 보자.
2) 현실은 규모다.
위에서 번인세 이슈를 언급한 김에 한 꼭지로 이를 다뤄보고 넘어가자. 교과서에서는 법인세가 비례세인 한 법인세율 증가가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법인세율 소폭 상승도 재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오곤 한다. 왜 그럴까?
교과서에서 보여주는 0보다 크다/작다란 기준은 쉽게 얘기하면 Yes or No 정도의 판단 기준밖에 되지 않는다. 대신 기업이 내리는 투자의 결정은 How much가 들어간다.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자 하는 어떤 기업을 생각해 보자. 일단 세후 이익이 0보다 크다면 투자를 할 수 있는 상태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Yes) 그런데,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상품 보관 창고를 전국에 몇 개 건설할지, 창고들의 규모는 어떠할지 결정하는 것은 이익의 크기다. (How much)
만약 투자 관련 분석을 한 결과, ① 우선 서울 강남 → 강서 → 강북 → 강동 순으로 창고를 짓고 ② 이후 경기도에 짓겠다는 투자의 수열이 나왔다고 치자. 서울 강남에 창고를 건설하는 데 100억이 드는데, 세후 이익이 50억이라면 이 기업은 그 해에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론상으로는 세후 이익이 50억으로 0보다 크지만, 현실 판단 기준에서는 첫 단게인 100억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No가 되는 셈이다.
4. 회사의 목표가 와 닿지 않는 이유
우리는 오랜 시간 교과서에 익숙해져 왔다. 비단 고시나 학문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취업을 위해서라도 학점을 받기 위해 교과서를 열심히 익혀야 했다. 그리고 교과서는 우리에게 저량을 가르쳤다.
교과서를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교과서는 우리가 모르던 영역을 알게 해 주고, 우리가 하지 못하던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확장을 위해서는 가정(Assumption)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한 가정들로 인해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여 우리 눈앞에 몇 줄의 수식, 몇 개의 선이 가로지르는 그래프로 보여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이 아니라 그 가정을 밑바탕에 깔고 전개된 이론들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회사에 오면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론들이 거리가 멀어진다. 회사와 개인의 간극이 여기서 비롯된다. 말 많은 선배들이 지나가며 혀를 찬다. "공부 머리와 일 머리는 다른 거야.". 우리는 억울하다. 회사 일은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정리된 교과서도 없다. 서점을 뒤져보라. 회사와 연관된 서적을 찾으면 처세술 책이 모든 칸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5. 해결책 - 잡상을 마무리하며.
취직을 하고 진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학창 시절에 간과했던 가정들을 인지해야 한다. 경제학에서 즐겨 쓰는 가정은 "Ceteris Peribus"로서, "만약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If other conditions being equal)"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사회생활을 하며 상아탑에서 벗어나 이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싶다면 저 짧은 가정 하나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의 꼰대, 썩은 사과들 앞에서 웃으며 버텨내는 방법요? 저는 하나의 상황극을 해요. 기업 스파이가 되었다고 상상하는 거죠. 제가 순간 감정을 못 참고 욱하는 순간 저는 이 회사에서도 잘리고, 저에게 지령을 준 보스도 저에게 실망하게 되는 거죠. 엉뚱하지만 때론 그런 연극 같은 발상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대화에서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이다. 이 잠상을 마무리 짓는 해결책도 유사하다. 게임을 하자.
가정을 되돌아보라는 말이, 모든 가정을 부정하라는 뜻은 아니다. 가정을 부정하면 당신이 배웠던 이론들은 모조리 무너진다. 그런 극단적인 발상의 변환을 했을 때 닿게 되는 귀결점은 좌절뿐이다. 온건한 변신을 꾀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임을 해 보자.
당신이 학창 시절 동안 열심히 배웠던 이론이 있다. 그리고 용케 이를 접목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제 그 업무를 진행하면서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가정들이 현실에서 얼마나 달라지는지 카운트를 해 보라. 그리고 그 결과 프로젝트가 어떤 부분에서 이론과 달리 가고, 어떤 부분은 이론이 현실을 여전히 잘 설명하는지 관찰해 보자.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당신의 머릿속에 그 프로젝트를 설명할 이론 몇 개를 정리할 수 있고, 그중 어떤 가정을 희생/변형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만큼 성장한 것이다. 재미난 자신만의 게임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작업들을 거듭하다 보면 '차선의 이론'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수정본을 머릿속에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 처음에 이 글을 읽으면 이론과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 주장으로만 다가갈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런 연습을 좀 하다 보면 느끼는 점이 다양해진다. 우선, 이론이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왔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좀 더 노력을 하면 현실적인 업무에서 다양한 이론들을 접목하는 재미까지 누려볼 수 있다.
언젠가 하달된 업무로 회귀분석을 적용해 보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마음 맞는 후배랑 몇 번의 점심시간에 그에 대한 모델을 짜 보며 재밌다고 웃던 기억이 난다. 정말 소박한 엑셀 함수였지만 그런 발상의 전환 내지는 나만의 이론 도입을 시도했다는 사실 만으로 즐거웠다.
'통합교과'는 열린 사고다. 잊지 말자. 회사에서 당신이 해야 하는 일들은 정형화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그 일을 하며 당신이 느낄 재미는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