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재정의하자.
레이 달리오(Ray Dalio)는 미국에서 가장 큰 헤지펀드를 운영하는 회사인 Bridgewater Associates의 CEO다. 하루는 그의 강연을 담은 Ted 영상을 본 적 있다. 강연에서 그는 강조했다.
How do I know I am right? (내가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진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Tool을 제시했다. 그 Tool이 가진 핵심은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을 비교하는 과정이었다. 내 판단을 비교함으로써 편견과 주관성을 배제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칭송받는 사람이 자신의 판단을 검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주변에 비해 너도나도 썩 대단할 것 없는 우리들이 서로 아귀다툼하는 현실이 문득 답답했다.
직장에서 유독 강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좋은 방향으로 가치관을 세운 사람이라면 훗날 기업의 비전을 제시하는 CEO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집스러운 사람 대부분은 주변에 피해를 주는 부류인 경우가 많다. 꼰대, 개저씨, 사이코, 또라이 등등. 얼마나 많은 수식어들이 그들을 가리키고 있는지 생각하면 회사를 옮기든, 한국을 떠나든 쉽게 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희한한 것은 피해를 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그들 대부분은 "그냥 네가 참아."라는 말만 듣게 된다는 점이다. 옛 속담에 맞은 놈은 발을 뻗고 잔댔는데, 현실은 이와 반대다. 때린 사람은 자기가 이상한 부류라는 것을 인지도 못하고 잘 지내는 반면, 맞은 사람은 스트레스 풀랴, 상담받으랴, 때론 법적 대응책을 찾으랴, 술로 한탄하랴 잠잘 시간도 없다. 결국 퇴사는 대부분 후자의 몫이다.
그들의 완고한 고집은 어디서 오는 걸까?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다. 레이 달리오가 스스로 안고 살던 고민을 그들은 일시에 해결해 버린 것이다. "I Know I'm right!"
누가 괴물을 만든 것일까? 가정, 학교, 회사 모두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 영향은 다르다. 비교를 해 보자.
① 가정 : 성격이 좀 이상하더라도 어긋난 짓을 하지 않으면 굳이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② 학교 : 성격이 좀 이상하더라도 성적이 괜찮으면 굳이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타인과 어울릴 수 없는 정도의 외고집이더라도 친구들이 같이 안 놀면 그만이다.
③ 직장 : 성격이 좀 이상하더라도 일을 잘 하면 굳이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문제는 학창 시절처럼 친구 없이 혼자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학교가 가정보다 좀 더 복잡하지만 어쨌거나 혼자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밥도 혼자 먹어도 되고, 공부도 혼자 해도 된다. 수능 점수대로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에서도 혼자 수업 듣고 졸업할 수 있다. (나쁜 친구들이 일부러 왕따를 시키는 경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회사는 그렇지 않다. 이제 혼자의 공간이 없어졌다. 혼자서 입사하고 밥도 혼자 먹을 수 있지만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다. (자기 맡은 업무를 독립적으로 하는 것과 별개의 개념이다. 내 일이 자기 완결형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 앞, 뒤에 다른 담당자가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비유를 하자면, 학생 때는 식사/진학도 혼자서 하고, 공부도 칸막이 쳐진 독서실에서 혼자 하면 되지만, 회사에 오면 식사/입사는 혼자서 하더라도 일을 할 땐 독서실이 아닌, 광장-그것도 만인이 얽힌 강강술래 같은 놀이-에 나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를 모른 채 괴물은, 가정-학교-회사에서 모두 양분을 받았다.
그들이 버티는 이유는 대부분 비슷한 패턴을 띤다. 상사 중에 그들을 인정하는 유사한 부류가 꼭 있다. 이런 상사들은 꼭 그 사람들을 편애해서라기 보다는 굳이 다른 부서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업무가 추진되는 결과만 보는 사람들인 경우도 많다.
"김길동 차장이 일 하나는 잘 하잖아. 회사가 놀러 오는 데야?"
면담을 하러 갔다가 이 말로 먼저 밑밥을 깔아 두시는 부장님 앞에서 그냥 마음을 닫고 나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자, 이렇게 쓸쓸한 주니어 퇴사 스토리 하나 더 추가하고 말 것인가?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앞서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에서 적었다시피, 회사는 구성원들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려 종합하는 것이 이익이다. 악덕 김길동 차장이 얼마나 일을 잘 할지 모르지만, 김길동 차장이 회사에 존재하는 이유를 정당화할 수 있으려면 아래의 전제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① 김길동 차장의 역량이 방금 퇴사한 홍길순 대리의 역량보다 크다.
② 김길동 차장이 퇴직 전까지(향후 10년간) 회사에 안겨다 줄 이익의 현재가치가 방금 퇴사한 홍길순 대리가 퇴직 전까지(향후 20년간) 회사에 안겨다 줄 이익의 현재가치보다 크다.
③ 방금 퇴사한 홍길순 대리보다 새로 채용할 박둘리 사원의 역량이 크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자. ①번은 간혹 충족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회사에서 일한 업력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홍길순 대리는 억울하겠지만) 하지만 ②에서도 확실히 김길동 차장이 우월한가? 그리고 회사는 ③을 자신할 수 있는가?
또 하나의 치명적인 질문이 남았다. 방금 퇴사한 홍길순 대리는 김길동 차장으로 인해 퇴사한 5번째 사람이라면? 앞서 퇴사한 4명의 사람들이 가질 역량의 가능성, 그들의 안겨줄 이익의 현재가치는 ②에 모두 더해야 한다.
1) 일에 대한 인식 바꾸기 : 일은 "함께" 하는 것.
우선 상사는 일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내가 시킨 것을 제시된 시간까지 해내는 것"이 일을 잘 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시킨 것을 제시된 시간까지 "함께" 해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앞선 글에서 '통합교과'적 사고를 언급했다. 여기서도 이를 적용해 보자.
자신의 학창시절, 그리고 자녀의 학업 문제를 논할 때 다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말한다.
"한국 수학교육은 후진적이야. 답이 아니라,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중시해야지. 이래서야 내 (혹은 내 아이의) 창의성을 키울 수 있겠어?!"
하지만 일에서는 이를 까맣게 잊는다. 상사인 당신이 제시한 일을 척 갖다 주는 것은 '정답'만 제시한 것과 동일하다. 회사에서도 '풀이과정'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김길동 차장의 혹독한 지시에 눈물을 터뜨린 사람은 없는지, 부서원들의 야근이 몇 배는 늘지 않았는지 봐야 한다. 홍길순 대리의 퇴사 면담에서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회사 일은 '함께' 하는 것이다.
2) 문제점 객관화하기 + 스스로 해결책을 찾도록 유도하기
천재 레이 달리오도 자신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고민을 한다. 회사에도 이런 방식을 적용하면 어떨까? 김길동 차장에 대해 마녀사냥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홍길순 대리가 안쓰럽듯, 김길동 차장도 엄연히 존중받아야 하는 개인이다. (심정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 안다. 하지만-)
다만 김길동 차장 자신이 지닌 가치관, 업무처리 방식,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회사에서 받아들여지는 평균과 다르다는 인식은 심어줘야 한다. 대부분 회사는 이를 어려워한다. 폭언/성희롱 투서가 들어오더라도 인사 관련 직원이 에둘러 경고를 하는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이런 신고가 몇 번 누적이 된다면 이는 엄중한 사태로 인식해야 한다. 회사도 그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크게 어렵지 않은 방식 하나를 제시해 본다. 신고가 누적될 경우 "업무 관련 당신의 언행이 협업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라고 사실만 명시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문제점 제시는 없지만, 그렇다고 주관적인 비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후의 당혹감과 불안감은 그가 져야 한다. 스스로 심리학 책을 찾아보고, 주변 사람들과 어떤 부분이 다른지 관찰하고 느껴야 한다. 말투든 태도든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바뀌면 주변 개인에게도, 회사에게도 무엇보다 본인에게도 유리하다. 하다못해 주변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회화'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겠는가.
* 꼰대 대처법, 상사 스트레스 해소법 등, 개인에 대한 조언은 그나마 많은 편이다.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도 분명코 손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 사람의 성정은 잘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도 성인이고, 회사를 통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화다. 그리고 그 사회화를 유도하는 시스템의 힌트를 레이 달리오의 강연에서 얻었다. 개인과 회사 모두 이익이 되는 객관화 방식이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