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땅은 더 굳는가.
평판에 대해 논한 적 있다. 의식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회사에서의 평판이 형성된다는 내용이었다.
https://brunch.co.kr/@crispwatch/62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내가 얼마 전에 겪었던 안 좋은 일도 결국 내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수를 한 뒤 평판은 어떻게 움직일까? 나는 아직 혼돈 속에 있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글을 전개해 보려 한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설사 성능이 좋은 기계일지라도 많이 쓰다 보면 고장이 난다. 하물며 감정과 체력과 주변 상황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오죽하랴.
업무 문화에 관한 책들을 봐도 마찬가지다. 그 책들이 다루는 '좋은 문화'를 가진 회사들 모두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둔다. (내 실수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쓰다 보니 뻘쭘해진다.) 다만 핵심적인 갈림길이 두 번 나온다.
회사에서 평판은 저 두 개의 갈림길에서 크게 갈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갈림길을 잘 넘기면 비 온 뒤 땅이 굳듯, 평판을 좋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좋은 평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다. 설사 평판은 유지하더라도 업무는 바뀔 가능성이 높아진다.
좋은 문화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회사들이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특징은 '투명성'이다. 큰 잘못일지라도 일단 적기에 보고를 했다면 경우에 따라 이를 보상하는 회사도 있다. 물론 그 문제를 잘 해결했다는 점이 하나의 조건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핵심은 적시에 보고를 한다는 점이다. 혼자서 실수를 만회하려다가 더 큰 사태를 벌이는 경우를 많이 본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든지,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는 류의 표현들이 다 여기에 해당한다.
적시에 보고를 하면 좋은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데 있다. 내가 이런저런 사유로 이런저런 부분에서 실수를 했고, 이런저런 피해가 예상된다는 것이 사건 초반에 명확해진다. 그러면 그 책임 추궁은 논외로 하더라도 우선은 사건의 해결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회사 입장에서 볼 때 불필요한 시간 소모가 줄어든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보고를 하고 문제를 공론화 함으로써 관련 있는 부서의 사람들이 그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게 된다. "보고를 하는 순간 그 책임이 관리자에게 넘어간다."는 식의 이상론적인 말에 기대는 것까지는 않더라도, 나 혼자 끙끙대던 것을 다른 전문가의 손길을 받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유관부서와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제 논외로 치자. 그리고 그 책임 추궁 (징계라든지, 단순히 혼난다든지 등)도 별개의 문제로 치자.
회사의 입장에서 이 사람의 실수를 놓고 두 가지 판단을 하게 된다.
"한 번 실수를 해 봤으니 앞으로 더 잘 하겠군."
"걔는 안 돼. 그 영역에서 실수했잖아."
앞서 언급한 평판과 연관이 되는 부분이다. 물론 이번 실수로 말미암아 '걔는 안돼'라는 표현을 들었다고 해서 무능력자로 낙인찍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서 능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같은 실수를 앞에 두고 누구는 그 영역에서 더 잘하게 될 거라고 인정받는 반면, 누구는 그 실수를 또 할 것처럼 인식되는 것인가다.
회사 또는 상사가 두 번째 갈림길에서 판단하는 잣대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① 그 사람이 아니라 누구라도 유사한 상황에서 생길 수 있는 실수였는가?
(= 외부환경, 절차, 업무의 복잡성, 그 실수가 발생할 확률이 통상의 예측 범위에 드는지 등)
② 만약 다른 사람은 그런 실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왜 이 사람이 실수했는가?
(= 그 사람의 성정/역량/상황과 업무의 연관성)
③ 성정/역량/상황을 고려해서 이번 실수를 인정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이 실수에서 뭔가를 배우는가?
(= 그 사람의 반성적 태도, 업무 역량의 상승성 등)
①번 표지판에서 Yes. 라면 평판의 하락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②와 ③은 애매하다.
①에서 No. 를 얻었으나 ②에서 상황의 특수성을 인정받았다 치자. 하지만 이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적 공감 정도를 이룰 뿐이다. 만약 그 실수가 중차대한 것이고, 반복될 경우 회사에 지속적 악영향을 미친다든지, 그 사람의 성정/역량/상황이 그 업무를 지속할 때 개선이 안된다면 업무를 바꾸는 게 맞다.
①에서 No. 를 얻고 ②에서 상황의 특수성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③에서 Yes. 를 얻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실수의 크기와 회사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그 업무를 지속할지 다른 업무로 변경할지 판단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게 평판의 하락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수로 말미암아 업무가 바뀐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나 주변인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담대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담담하게 실수를 받아들이고, 즉시 주변에 공유하고 관련 부서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시간의 힘이 필요하다.
시간의 힘에 대해 시리즈물을 기획하고 있다. 시간이 가진 힘은 언제나 대단하다. 솔로몬 왕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말했던 것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도움이 되는 조언이다. (그래서 주로 군대에서 많이 통용된다.)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드라마를 볼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현실과 극화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신입사원도 선배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그거, 이렇게 해 보면 어때요?!"라고 말하며 일순간 해결을 해 버린다. 물론 아이디어를 꾸준히 내는 것은 옳다. 내가 늘 주장하던 게 '발언하라.' 아니었는가.
다만 내 말대로 안 된다고 해서, 내 설명을 이해 못한다고 해서 주변이 다 나쁘다거나 꽉 막혔다고 표현하면 안 된다. 내가 암만 똑똑해도 우린 결국 비슷비슷한 역량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더구나 내가 잘 모르는 영역까지 아우르는 것이라면야 더더욱 겸손해야 할 일이다.
겸손해야 자신의 실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마냥 나는 잘 났는데 상황이나 타인 탓만 하다 보면 원인 분석에 다가갈 수 없다. 실패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도 멀어진다.
비 온 뒤 모든 땅이 다 더 굳는 것은 아니다. 토질에 따라 진흙탕으로 갈수록 바뀌는 곳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갈림길 앞에서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고 최대한 긍정적인 시그널을 주는 수밖에 없다. 물론 해결을 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는 자세는 기본이다.
오늘도, 모두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