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는 것은 오래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삽시간인가?
사전에서 "Listen to"와 "Hear"의 뜻을 찾아보면 동일하게 "듣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서로 대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굳이 구별을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Listen to"는 의식해서 듣는 것, "Hear"는 들으려 애쓰지 않아도 들리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영어 공부를 하면 이런 설명을 종종 듣는다. 예문도 대개 유사하다. Listen to는 네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I'm listening to you.)이라면 Hear는 너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I heard about you.)는 류다. 어느 날 팟캐스트를 들으며 차를 몰던 중,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소위 말하는 회사에서 '평판'은 이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운 것일까? 흔히들 평판을 쌓는 것은 오래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 것일까?
선배에게서 '평판 관리 좀 하라.'는 조언을 들은 후배 입장이 돼 보자. 그리고 그 사람이 선배의 말을 들은 이후에 어떻게 행동을 바꿀지도 상상해 보자. 아마도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술자리에서 실수 않게 조심하며 회의에서도 미소를 머금은 채 고분고분하게 지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상이 어렵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직장에서 꽤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사람이 변화하려고 한 부분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자. 몸가짐, 술자리 실수, 회의에서의 태도를 조심하는 것은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한 노력에 가깝다. 구설수는 소문을 통해 퍼진다. 즉, '평판'이라고 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소문'과 연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일화에 빗대자면 '평판은 Hear를 통해 전파된다.'라고 인식하는 셈이다. 과연 그럴까?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다. 그 사람의 패션감각, 헤어스타일, 술자리 행동, 회의시 얌전한 정도로 업무 결과가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팀원들 기분을 망치거나 거래선에게 실수를 할 정도로 심한 경우를 제외한다. 전개의 편의를 위해 Outlier는 생략하자.) 업무는 그 사람의 역량, 일을 향한 태도에서 방향이 갈린다.
어떤 팀장에게 새로운 TF를 꾸려보라고 임원이 지시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 팀장은 몇 명의 후보를 추린 뒤, 그 후보들의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xxx대리 일 하는 게 어때?". 이 질문 역시 상당히 익숙하다. 임원이나 부서장이 새로 온다는 소문이 났을 때, 우리 부서로 옆 부서 누가 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눈에 띄는 연관 인물들에게 내뱉던 말이 아니던가.
평판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누적된 것이다. 의도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평판을 형성하는 핵심이다. 즉, "Listen to"에 가깝다.
평판이 의식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이 관계 속 반대편에는 그 대답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동화책에서야 '그 사람 어때?'라고 물을 때 긍정적인 면만 얘기한다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 오죽했으면 황희 정승이 밭 가는 농부에게 '누렁소와 검은 소 중 어떤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라고 물었던 일화가 구전되어 내려오겠는가. 그만큼 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조심하거나 한발 물러서는 사람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그 사람에게 유무형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오죽하겠는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칭찬만 하거나 불평만 한다면 어느 쪽이든 질문한 사람 입장에서는 불리할 것이 없다. 그 사람을 TF에 넣을지 말지 판단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물론 평판이 안 좋은 사람이라고 무턱대고 영입에 반대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는 때로 여러 가지 역학관계로 인해 싫은 사람과도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다만 주변 사람들의 말이 일관되다면 부여할 업무의 종류나 양을 결정할 때 참고할 수 있다. 또한 업무 중 생길 수 있는 갈등에도 사전 준비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 경우다. 5:5인 경우도 애매하지만, 7:3인 경우가 그보다 낫다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그 사람의 업무 역량을 좋게 평가한 7은 약하게 지나가듯 얘기한 반면, 3은 눈에 불을 켜고 목소리를 높여 그 사람 업무 역량을 폄하할 수 있다.
이런 경우 A라는 사람의 업무 역량에 대해 알고 싶은 상황이지만 대답을 하는 사람 중 Big mouth가 없는지 고려해야 한다. 흔히 Big mouth라고 하면 사내에서 소문을 내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만약 대답을 한 사람 중 Big mouth(B라고 하자)가 있고 그가 소수의 편에 서 있다면 A와 B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 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입 후보인 A에 대해 의도적인 질문을 던졌고, 의식적인 답변을 받았다. Big mouth가 누구인지, B와 무슨 일이 있었기에 A에 대해 다른 의견을 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난 것인가?
TF 책임자가 A 영입 여부를 결정할 때 평판은 참고 지표 중 하나가 된다. 평판이 어떻든 결론은 책임자의 결정에 달려있다. 남들이 혹평해도 책임자가 이 TF 업무에 그 사람이 적합하다면 뽑아서 쓰는 게 맞다. 그런 측면에서라면 평판은 '좋다' vs '나쁘다'의 구분이 아니라 ① '나와 맞는 편이다' vs '나와 맞지 않는 편이다'라든지, ② '전반적으로 일 처리를 잘하는 편이다' vs '맡은 일을 제대로 못해내는 편이다'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게 맞다. 흔히 ②를 '좋다' vs '나쁘다'로 일반화하는데, 엄밀히 보자면 옳은 표현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핵심은 책임자, 부서/업무 특성에 달렸다. 영입 전 파악했던 평판은 안 좋은 쪽이 7이었는데, 막상 TF에서 일을 곧잘 한다면 TF후 팀장은 좋은 의견을 냈던 3 쪽에 한 명을 더하는 셈이 된다. 7:3이라는 비율이 약간 기우는 것이다. 물론 반대도 성립한다. TF에서도 역시나 들었던 이야기처럼 일을 잘 못해낸다면 7:3의 비율에서 7 쪽에 의견을 보태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잠깐만 다시 사례 첫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팀장은 TF를 꾸리기 위해 영입 가능한 후보들을 추려 주변에 평판을 물어보았다. 대답들은 의식적으로 들었다. 문제는 팀장도 사람이라는 점이다.
사람은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 평판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들었던 얘기들이 무의식 중에 자리 잡게 된다. 사람을 쓰기 전부터 선입견을 갖고 바라볼 수도 있고, 선입견을 버리기 위해 애를 쓰다가도 조그만 실수 하나에 일반화를 하기도 한다.
평판이 올바르게 전달되려면 지금 용인하는 사람도 중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번 TF가 끝나면 7:3이 7:4가 될 수도 있고 8:2가 될 수도 있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선입견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업무를 처리하는 그 사람의 업무 방식이 나와 맞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업무에서 감정(호오, 好惡)을 배제하는 게 중요하다고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언급한 적 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좋든 싫든 일단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면 이번 업무를 독립 사건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선입견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의 역량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나와 호흡을 맞춰 볼 틈도 없게 된다. 평판은 참고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용인하는 사람이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평판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봤다. 평판은 소문과 달리 의식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평판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지금 호흡을 맞추는 사람과 얼마나 잘 맞는지에 따른 독립 사건들의 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업무를 시작하기 전 평판을 조사하더라도 단순한 참고 지표 중 하나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 업무가 끝나고 나면 평판은 다시 의견을 하나 더 얻게 된다.
상기 과정을 생각하면 평판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구설수'로 한 사람의 인생이 전복되는 것과는 다르다. 너무 지저분하다거나 난폭하다거나 몰상식하다거나 도덕관념이 없다면 구설수에 오르고 업무 역량 여부를 떠나서 함께 일하기 꺼려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원래 안 그랬던 사람이 뒤로 나쁜 짓을 하다가 걸려도 마찬가지다.
물론 평판도 고정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여러 개의 독립 사건을 거치며 누적된다. 그러는 사이에 이쪽으로 때론 저쪽으로 의견이 기울기도 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부정적인 쪽으로 의견이 누적되는 것이 반복되는 경우다. 모든 일들이 독립 사건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나와 잘 맞지 않으니까...'라고 자위하며 넘어가기에 횟수나 강도가 임계치를 넘어간다면 스스로를 돌아볼 때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업무 평판은 일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매번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이번 일은 뜻밖에 재미있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당신의 평판이 하락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한 명 몫을 해 내는 것. 더 단순화하자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 이것은 직장생활이 영원한 황금률이다. 그리고 이 단순함이 당신의 평판을 지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