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하는 조카들의 위해 신상정보는 감추었지만, 이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숨길 게 아니라서 사람들에게 후원하는 내용들을 종종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걸 선한 영향력이라 부르며 일부는 함께 하고 싶어 했다. 중학교 졸업식 이후 김 조카에게 “아빠”라고 불린 얘기를 하면, 눈시울을 붉히며 단지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자신도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소개를 요청하는 지인이 몇 있었다.
언젠가 어린 딸을 둘 키우는 친한 동생이 자기도 후원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동생이 이미 더 크고 훌륭한 일을 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내가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은 가정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경우인데, 너는 가정에서 이미 아이들을 보호해주고 있지 않냐고. 정 하고 싶다면 네가 아이들을 성인으로 만들고 정신적인 여력이 생겼을 때 하는 게 좋겠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의 버리거나 학대하지 않고 보살피는 부모들은 나보다 더 좋은 일을 이미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스스로를 희생하고 사랑을 듬뿍 주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대상이 자신의 자녀들이라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인지하지 못할 뿐. 세상에 퍼져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다 보면, 대다수는 부모의 사랑과 헌신에 관한 것들이다. 내가 하는 일은 그런 부모의 역할을 조금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지인들의 착한 마음이 고마웠지만 그때마다 신중할 것도 요청했다. 일순간의 동정심에서 시작한 후원의 결과가 안 좋은 경우를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었다. 내가 보육원에 소개해준 사람 중 나보다 더 자기 후원 아동에게 애착을 가진 후원자가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자신을 볼 때마다 선물을 사달라고 했다. 김 조카와 나와의 관계처럼 그 아이도 매일매일 산타클로스를 꿈꾸었을까? 어느 날 그 후원자가 아이와 헤어진 후 화를 참지 못하고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 아이 부모가 나한테 선물을 뜯어내라고 교육시키는 것 같아.”
그 아이는 무책임한 부모의 방임으로 인해 시설에서 보호 중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확인해 봤으나 아이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경제적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으니 아이가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고 분출한 것일 뿐. 그러나 그 후원자는 초등학교 3학년의 욕망을 이해해주지 못했고, 부모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면서 아이에게 소홀해졌다.
아이들이 동정받을 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착하고 순수한 것만도 아니었다. 일부는 어른들의 상상보다 현실 파악이 빠르고 영악했다. 김 조카의 친구인 조카 K는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았다. 이런 성격으로 13살이 되기까지 후원자 하나 없던 김 조카와 달리 후원자가 셋이나 있었다. 나처럼 젊고 의욕적인 후원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K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후원자를 속이기도 했다. 한 번은 생일도 아니면서 가짜 생일을 후원자에게 말했다. 후원자들은 경제적 여유도 있었고 동정심도 가지고 있어서, 바로 생일을 축하하며 선물을 사줬다. 하지만 K는 영악함과는 다르게 치밀함이 부족했다. 다른 욕망이 생겼을 때 또 거짓말을 했고 결국 후원자에게 들키고 말았다.
동정심은 일순간 분노와 배신감으로 탈바꿈했다. 결국 두 명의 후원자가 떠났고 조카 K에게는 할머니 후원자 한 분만 남았다. 동정심으로 후원을 시작하겠다는 사람들을 내가 말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정심으로 후원을 시작했다간 아이가 아닌 내가 상처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김 조카에게 너나 다른 조카들을 동정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동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정심을 유발하여 남을 이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김 조카 역시 자신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자신에게 동정심을 발휘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처지를 이용해 동정심을 유발하여, 원하는 걸 얻고자 함을 가끔 보게 된다.
출생아 감소로 인한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는 뉴스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급격한 출생아 감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이 있다. 이 소중한 인적자원들 중 일부는 제대로 사랑과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다. 그리고 무기력하고 상처만 가득한 성인으로 자라난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도둑질로 끼니를 연명한 청년 장발장. 정서적 안정감 없이 슬픔에 싸인 채 성장해 가는 머리가 짧은 아이. 이 소중한 개개의 삶들을 방치하여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만들지 못하면서 많이만 낳는다고 우리의 미래가 좋아질까?
안젤리나 졸리가 난민 봉사 중 한 아이에게 한 말이 한때 회자되었다.
“아가야,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이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거야.”
이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긴다. 만약 누군가를 후원하고 싶다면 동정심을 버려주시길 부탁하고 싶다. 우리가 이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이며 함께 살아갈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동정받아야 할 아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