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회 Jan 03. 2021

12. 진로탐색

너를 어찌하니

중학교를 졸업하는 김 조카가 세무·회계를 공부하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친구가 간다고 해서요.”

“친구는 거기 왜 가려고 하는데?”

“거기가 남녀공학이래요.”


어이구. 그럼 그렇지. 세무·회계가 좋아서 신청하지 않았을 거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뭔가를 해보고 싶은 적이 없었다던 김 조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잘하는 것이나 장래 계획이 아직 없었다. 슬슬 조바심이 났다. 중학교 때와 다르게 공부에 대한 잔소리를 했다. 하고 싶은 걸 말하면 학원비를 지원해주고 업종에 대해 알아봐 주겠다고도 했다. 김 조카의 친구인 조카 K는 제빵사를 목표로 제빵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조카 K의 후원자가 부러웠다. 



어느 날 녀석이 자기도 잘하는 게 있다고 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내게 녀석은 


“저.. 도박에 소질이 좀 있는 거 같아요.”


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짤짤이를 해서 100원으로 2,000원을 땄단다. 잃는 날보다 따는 날이 더 많다고도 했다. 어휴.. 그걸 자랑이라고. 나는 속으로 잠시 ‘하.. 이 새X를 어째야 하지?’라고 생각했지만 점잖은 말로 타일렀다. “깊이 빠지면 인생을 망치는 세 가지가 있느니라. 도박, 술, 여자(이성)”라고.



녀석은 고등학교 성적이 의외로 좋았다. 영어 성적은 나빴지만 회계 점수가 특히 좋았다. 김 조카의 학교는 특채로 1년에 2~3명 정도가 세무공무원으로 뽑혔고, 제1금융권에도 매년 몇 명이 취직했다. 그래서 녀석이 조금 노력한다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김 조카도 학교에서 다 배운 내용이라 회계 자격증 공부가 쉽다고 했다. 그래서 취업을 위해 자격증을 많이 따 두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쉬운 전산회계 2급 자격증 조차 몇 점 차이로 계속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는 ‘방심했네.’ ‘아쉽네.’하는 변명을 했다. 그래서 조카를 나무랐다.

“너는 이미 아는 내용이라 생각하고 하루 이틀 전 대충 준비하겠지만, 60점 넘겨야 통과하는 시험을 60점 맞겠다고 공부하면 계속 몇 점 차이로 떨어지게 돼.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몇 점 차이가 어마어마한 실력의 차이고,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어. 네가 60점을 넘겨야 합격하는 시험을 준비한다면 최소 80점을 맞는다는 목표로 그 정도 공부를 해야 안전하게 합격할 수 있다.”


김 조카는 “오! 그렇네요.”라며 알아들은 척했지만 시험에 계속 떨어졌다. 분명 조금만 노력하면 붙을 수 있는 시험임에도 자격증 하나를 가지고 3년 동안 아슬아슬한 밀당을 했다. 그렇게 수차례 떨어진 끝에  졸업을 앞두고서야 겨우 전산회계 2급 자격증을 하나를 손에 넣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여러 번 시험장을 방문하고 떨어지는 노력이 더 대단해 보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김 조카는 진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내게 하사관이 직업으로 어떤지 물어봤다. 보육원에 새로 오신 선생님에 해군 하사관 출신인데, 보육원 생활이 군대보다 더 빡센 것 같다며 직업 군인을 권했단다. 과거에는 인기가 없어서 병사에서 소위 말뚝을 박아서 하사관이 되었지만, 요즘은 취업난으로 인기가 높아졌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이왕 하려거든 2년을 기다리지 말고 시험을 쳐서 바로 하사관이 되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그랬더니 바로 하사관 되기를 포기했다. 녀석이 시험 같은 노력 없이 취업할 수 있는 직장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김 조카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했으나, 돈과 시간이 아깝다며 취업을 하겠다고 했다. 취업이야 되면 좋지만 딸랑 자격증 하나로 취업이 되는지는 의문이었다. 거기다 학교의 추천서 순서를 기다릴 뿐, 스스로 구직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세무·회계사무소들도 여직원을 선호했다. 쿠쿠 밥솥 만드는 공장에서 제안이 왔다. 월급이 괜찮았는데 녀석이 거부했다. 힘든 일은 하기 싫었던 거다. 결국 고등학교 3년 내내 아무 노력도 안 한 끝에 취업 추천 시장은 마무리됐다.



김 조카가 정신적으로 너무 나약한 것 같아, 군대를 다녀오면 어떠겠냐는 제안도 했다.  녀석은 하사관 알아볼 때와 다르게 싫어했다. 사회복지시설에 5년 이상 생활하면 군대가 면제된단다. 굳이 면제된 군대를 가서 2년 더 돈 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단다. 


‘근데 지금 네 능력으로 돈 벌 기회를 얻을 수 있긴 한 거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간 조카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잔소리를 희생한 나 자신을 탓했다. 물론 내 잔소리를 들을 조카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녀석을 이끌어줘야 하는 어른이자 삼촌이니까. 지인들을 통해 조용히 취업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한참 걱정을 하고 있는데 녀석이 뜻밖의 소식을 알려왔다. 대학교 한 곳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전문대 사회복지과라고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지만 반가웠다. 사회복지사에 관심이 있었냐고, 왜 사회복지과에 원서를 넣었는지 물었다.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요.”


그럼 그렇지. 고민과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가장 잘 아는 영역으로 흘러들어 간 거다. 무심히 넣은 원서를 하나로 조카는 대학생이 되었고 사회복지사가 진로가 되었다. 물론 이 선택이 나쁠 것 같진 않았다. 지금의 김 조카가 무한경쟁의 일반 회사를 다니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녀석에게 방향이 생겼고, 사회 진출을 준비시키기 위해 2년의 시간을 더 벌었다고 생각하니 나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전 11화 11. 동정받아야 할 아이는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