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조카의 친구들은 녀석이 고아인 줄 모른다. 나도 녀석의 출생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삼촌’이라 부르게 했다. 외삼촌이라면 성이 달라도 상관없고, 김 조카가 또래가 아닌 어른이랑 다녀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하지만 내 고민과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조카는 변함없이 나를 ‘쌤(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거리를 두었다. 비싼 코트나 다른 물건을 사주어도 거리감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떤 노력과 비용을 들이더라도 구해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일요일 낮에도 만날 수 있게 되었기에 김 조카에게 물었다.
“너 요즘은 교회 안 다니냐?”
“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기 않아서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녀석이 어떤 기도를 했을지 짐작되었다. 아마 자신에게도 아빠, 엄마를 달라고 했겠지. 하지만 그건 하나님도, 후원자인 나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힘든 사람일수록 정신적으로 의지할 무엇인가가 있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런 면에서 김 조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긍정적으로 봤다. 하지만 종교도 녀석에겐 의지가 되지 못했다. 김 조카는 이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김 조카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공부하라는 말은 아예 하지 않았다. 나도 부모님께 지겹게 듣고도 안 따랐는데,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후원자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나를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곤란하기도 했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언은 했다. 그럴 때마다 김 조카는 “머리가 아프다.”며 더 얘기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후원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났지만 녀석은 꽤 내게 불성실했다. 성적도 갈수록 떨어져 반에서 꼴등 앞이었고 잘한다던 컴퓨터도 평이하게 되었다. 나도 서서히 정신적 피로를 느꼈다. 언젠가부터는 의무감으로 만나러 가게 되었다.
중학교 졸업식. 그날도 휴가를 내고 의무감에 이끌려 김 조카의 학교로 향했다.
“야! 너 아빠 오셨다.”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모르는 아이가 나를 보더니 김 조카를 향해 외쳤다. 김 조카의 친구인가 보다. 나를 언제 봤다고. 아이들은 어른의 나이를 잘 구별 못하니 나를 아빠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녀석, 나랑 많이 닮았다. 외모뿐만 아니라 인상도. 그런 생각을 해 본 건 오늘 이 졸업식에서가 처음이다.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 그런데..
그 순간 김 조카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웃음기로 가득 찾다.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녀석.
어라? 3년 동안 단 한 번도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없다. 나를 향해 이렇게 웃어주는 상황 또한 없었다. 순간 가슴속에 응어리 맺혔던 뭔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분만실에서 막 세상 밖으로 나와 울음 짓는 갓난아기를 처음 안은 엄마의 심정이 이런 기분일까? 산모가 10개월의 산고 끝에 아이를 낳듯, 나는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3년 동안 녀석을 마음으로 품어왔던 내 노력과 고뇌의 결과물을 처음 마주하는 이 기분.
친구의 착각에서 나온 <아빠>라는 마법의 단어.
그 힘은 강렬했다.
졸업식 내내 김 조카의 입은 귀에 걸리어 내려오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녀석이 얄미울 때마다 그 날을 떠올린다. 졸업식날 나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어주던 녀석의 표정.
어떤 신이 녀석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건지도 모르겠다. 졸업식 이후 녀석에게는 아빠가 생겼다. 물론 그 신이 내게 동의를 구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이 기분이 싫지만은 않다. ‘쌤’이나 ‘삼촌’이란 호칭은 어디 갔는지, 덩치가 나 만한 청소년이 계속 나를 “아빠!”라고 불렀다. 그러면 나는 주변의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녀석을 다그쳤다.
“야이 눔의 자식아! 삼촌이라고 부르랬지! 내가 너 같은 아들이 있으려면 18살에 사고를 쳐서 고3에 애를 낳아야 하거든? 근데 네가 어디를 봐도 삼촌은 모범생이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