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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un 11. 2018

20분 동안 샴푸의 요정을 분석하자

장정일- 샴푸의 요정

최근 유빈이 신곡을 발매했다. 숙녀란 곡으로, 시티 팝 장르다. 꽂혀서 수십 번을 반복 청취했다. 장르 명을 듣자, 명쾌한 구분 짓기가 가능했다. '규정' 작업을 통해 카테고리가 생긴다. 시티팝은 80, 90 년도 유행했던 일본발 장르로, 한국 음악 시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초창기 국내 시티팝 목록을 보던 중, 즐겨 듣던 곡을 발견했다. 한국 대표 시티팝 곡인 샴푸의 요정을 다시 듣게 된 배경이다. 곡의 탄생 배경이 궁금해 리서치를 하던 중, 모티프가 된 시가 있음을 알게 됐다. 내용이 직관적이면서도 심오해 몇 번인가 되뇌었다. 깊게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이번 20분 글쓰기에서 동명의 원작 시 '샴푸의 요정'을 읽고 분석하게 됐다. 



샴푸의 요정

사내는 추리극장이 싫다. 국내 소식이
싫고 운동경기가 싫고 문제의 외화가
싫다. 안 본다. 그리고 방송출연하는
많은 다른 여인들이 역겹다. 나는 그녀만을 본다.
여덟 시 반의 그녀를 기다린다. 보시겠읍니까
15초 동안 그녀는 샴푸회사를 위해
광고하지요. 보시겠읍니까

그녀는 인사를 잘한다. 안녕하셔요
그녀는 미소띠며 속삭인다
파란 물방울 무늬 잠옷을 입고
그녀는 머리를 감아 보인다. 무지개를 실은
동글동글한 거품이 티브이 화면을 완전히
메운다. 그러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는 거지
새로 나온 샴푸, 당신이 결정한 샴푸라고
향기가 좋은 샴푸, 세계인이 함께 쓰는 샴푸
아마 당신은 사랑에 빠질 거예요
라고 속삭이는 것이지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아시아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요정이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
매일 저녁 여덟 시 반, 티브이 화면을 찢으며
우리 곁에 날아오는 샴푸의 요정. 그녀는 15
초 동안 지껄이고
캄캄한 화면 뒤로 사라진다. 여덟 시 반.
매일 저녁 여덟 시 반에는 그녀가
출연하는 광고가 있다. 기다려 주세요

광고가 끝나면 사내는 무기력하게
티브이를 꺼 버린다. 매일 저녁 15초가 필요할 뿐
사내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짝사랑하는
그녀 사진을 사내는 모은다. 방에 붙이기도 한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 수영복을 입은 모습
승마복을 멋지게 입은 사진을 그는 모은다.
그리고 칼에 대어 잘라낸다. 샴푸의 요정이
어느 영화에 출연해서 보여주는
곧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의 남자 배우 입술을
면도날로 잘라낸다.

선전문안이 들끓는 밤 열 한 시
나지막이 샴푸의 요정이 속삭이지 않는가
그녀의 노래가 귓전에 맴돌지 않는가.
쓰세요, 쓰세요, 사랑의 향기를
느껴 보세요. 그리고 그녀의 약속이
가슴속에 고동치지 않는가. 오늘 밤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광고 속에서
그녀는 약속했었지. 욕망이 들끓는 사내의 머리통

옷을 벗는 요정. 담배불 자국이 송송한 소파에
비스듬이 눕는 요정. 신비스레 신비스레
가라앉는 요정. 뜨거운 입술로
이리 오세요 예쁜 아기, 속살거리는 요정
환영이 들끓는 밤 열 두 시, 이윽고 샴푸의 요정은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냄새를 맡아 본다. 제가 권한 것을 쓰셨겠지요
물론 그러하셨겠지요?

0시 삼십 분. 사내는 샴푸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무언가
시도하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실내화를 끌며
얼마나 잽싸게 달아나는가. 참 잘하셨어요
샴푸는 역시 우리 것이 최고랍니다. 계속
애용해 주세요. 분홍빛 잠옷을 끌며
샴푸의 요정은 사라진다. 아아
좀더 있어 주세요! 좀더!

꿈에서 깨어나
사내는 타자기를 두드려댄다.
딱딱딱딱딱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은
샴푸요정이다.





내용을 정리하면,
화자는 상업 광고 모델인 그녀에게 빠졌다. 방송에 출연하는 다른 여인들은 역겨우나 그녀는 고결하다. 그녀가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는 특별한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인품? 그녀의 고상함? 그녀의 순결함? 그녀의 실존을 화자는 알 길이 없다. 그녀와의 모든 접점은 TV를 통해 이뤄진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유일하며 절대적인 이유다. 다른 이유는 필요치 않다. 그녀에게 매혹돼 합리성을 잃는다.
화자의 망상은 콘티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 든다. 그녀의 말이, 행동이 자신을 향한다 믿는다. 시청이란 수동적 행위에서 팬심은 확장된다. 다른 활동을 찾아보고, 상대 배우에 저주를 내리기도 한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커지자, 꿈 (혹은 환상)을 통해 그녀와 만나게 된다. 환상 속에서 조차 그녀와 진심을 나눌 수 없다. 그녀는 광고하는 샴푸를 사용했는지 묻고 떠나버린다. 그럴수록 '나'는 그녀에게 깊게 몰입한다. 

시의 키워드를 꼽자면,
1. 자본주의 사회가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
2. 상품의 홍수
3. 이미지의 사회
4. 이미지의 맹목적 추종
5. 이미지의 허무/ 실체 없는 이미지
6. 단절의 시대 (소통의 부재)
 정도다.

시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첫 번째,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다. 아래 2~5번 항목은 모두 이 아래 포함되어 있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들리아르의 시뮬라르크 개념을 사용해 이해하면 '이미지'란 키워드가 '자본주의' 키워드를 압도할 위험이 있으나, 자본주의의 큰 맥락 안에서 읽으면 조금 더 깊은 이해가 있을 수 있다. 실재를 반영한 이미지가 실재를 감추고 변형하며, 관계를 끊고 종래에는 그 자체로 새로운 가치가 된다는 게 요다. 화자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재탄생한 이미지를 사랑하고, 영유한다. 상품의 홍수는 이미지의 홍수로 변하고, 대중 매체는 이미지를 퍼다 나른다. 잡지도, 영화관도, TV도 그 채널이다. 나는 실재를 무시하며 이미지를 사랑하는 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결국 이미지로서의 그녀는 진정한 화자의 샴푸의 요정이 됐다. 우리에게 허무하며, 실체 없는 헛스윙으로 보이지만, 그에게 실체는 확실해진다. 


단순히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작품을 읽고 싶지 않았다. 캐캐 묵은 담론이 되고, 상투적인 시로 거듭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들리아르의 이론을 가져와 이미지에 빠진 남자가 이미지를 그 자체로 수용하는 과정과, 어쩔 수 없는 사회의 압력이 그의 행동을 고착화시키는 촉매가 된다 읽었다. 자본주의의 부작용으로 단정 짓는 순간 그의 행동은 단순히 어리석고 애처로운 게 된다. 화자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작업이 다채로운 감각을 맛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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