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띤떵훈 Mar 28. 2019

1984가 내게 남긴 것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톺아보기




오늘 삼 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 1984를 읽었다. 다른 두 편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자먀친의 우리들이다. 이로써 세 편 중 두 편(멋진 신세계, 1984)을 읽게 됐다. 분량이 되나, 몰입감이 좋아 독파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멋진 신세계와 다른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1984를 택하겠다. 왜? 더 생생하다. 



이번 발제 도서이기도 한 1984는 암울한 미래상을 그리고 있다. 유토피아와 대치되는 개념인 디스토피아는 부정적인 미래를 그리는 소설 장르다. 비슷한 장르로 아포칼립스물이 있다. 정도의 차이인데 완벽히 멸망하면 아포칼립스, 멸망까지는 아니지만 암울한 미래상이 나오면 디스토피아다. 참고로 멸망 후의 남은 자들을 그리는 장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멋진 신세계가 그리는 암울한 미래는 극단적 쾌락의 세계인데 반해, 1984 속 미래는 극단적 통제와 검열의 세계다. 후자가 더 암울하다. 둘 다 파멸이지만 멋진 신세계는 행복에 도취된 파멸이다. 



1984의 핵심 키워드는 빅 브라더다. 빅 브라더는 실존 인물이 아닌, 당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가상의 존재다. 완전 무결하며, 모든 것을 꿰뚫고, 초월적인 권력이 빅 브라더다. 힘의 근간이 되는 것은 정보 통제, 검열과 감시, 날조, 빈곤화, 분노 조장 그리고 언어의 말살이다. 멋진 신세계의 토대인 과학 기술보다 1984의 억압하는 사회의 모습이 더 사실적이다. 우리의 1984년은 한참 전에 지났다. 안심할 수 없다.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감정에 대입해 고통을 나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비극 개념을 차용할 수 있다. 비극이 더 우월한 이유는 카타르시스의 제공과 지적 정화에 있다.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 안도하며 빅 브라더의 영향이 적은 사회 속에 삶을 감사한다. 소설이 그리는 비극은 사회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한 자유의 무게를 사유할 수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의 말이 떠올랐다. 언어는 사회와 문화를 비춘다. 반대로 언어를 말살하고 개념을 소수가 자의적으로 편집한다면 대중이 사회를 보는 눈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 빅 브라더의 신봉자들 - 사상경찰과 스파이, 세뇌된 당원은 이미 정신을 완벽히 통제 당한다. 역사는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역사가들이 만든 역사다. 단 하나의 사실로서의 역사는 지워지고 누군가가 원하는 역사가 진리인 세상이다. '왜'라는 질문은 용인될 수 없다. 사회가 원하는 것은 2+2를 5라고 말할 수 있는 이중사고의 달인들이다. 존재의 집을 망가트리면 존재도 망가진다.



언어를 통제하는 방법은 이렇다. 첫째, 어휘의 절대량을 줄인다. Good의 반대말은 Bad가 아닌 ungood이 된다. 어휘를 줄이면 사고의 폭도 줄어든다. 둘째, 줄임말을 쓴다. 예를 들면 진리 부서를 진부, 애정 부서를 애부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휘를 만들어 원래 의미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다. 명칭이 갖고 있는 연상적 의미를 지우는 용도다. 셋째, 의미를 선별한다. 예를 들면 Free란 단어에서 자유란 의미를 제외하고 결핍이라는 의미만 남기는 방식이다. 좋은 에세이를 쓰기 위해선 시제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는 시제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당에 반하는 어떠한 불경한 생각도 설 수 없다. 사람들은 애꿎은 곳에 분노를 쏟아내고, 당은 권력을 유지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유지 조건이다. 국가 단위로 어린이를 전문 스파이로 육성한다. 자신의 부모의 악행(흔히 당에 반하는 행위)를 고발하면 칭찬과 포상한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사상경찰을 심어놓는다. 사복 경찰과 비슷한 맥락으로 누구도 사상경찰의 존재를 알 수 없다. 그들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고, 언제고 우리를 심판할 수 있다. 텔레스크린과 더불어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내 자식이, 친구가, 와이프가 나를 밀고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사각지대가 없음을 알린다. 반란을 포기하지 않으면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일반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의 결말엔 어떤 식으로든 악의 왕정에 균열이 생긴다. 줄리아를 향한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적극적 반란이다. 윈스턴의 마음은 희망의 씨앗을 후대에, 아니면 독자들의 가슴에 뿌리는 것이다. 즉, 당의 완벽성에 구멍이 뚫리는 것, 바로 마지막까지 증오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윈스턴은 사랑을 부정했고, 빅 브라더를 온몸으로 수용하며 생을 마쳤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지극히 인간적이며 사실적이다. '감방 안에서는 고통과 고통을 예감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라는 윈스턴의 말이 증명한다. 고통 앞에 영웅은 없었다.



마지막 남은 마음까지 권력에 굴복하고, 증오는 철저히 소거된다. 타인을 괴롭히는 것이야말로 권력 행사다. 권력 행사는 여러 세대를 거쳐 더 완벽해진 형태로 거듭날 것이다. 설국 열차 속 맨 앞뒤 칸의 노인들은 개체 수 유지를 위해 모든 승객을 조종한다. 모두가 그들의 꼭두각시다. 설국 열차는 멈추고 새로운 희망은 밖으로 향했지만, 1984의 세계는 전복이 불가능한 완성된 일당 독재의 세상이다. 1984의 열차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현실로 넘어온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전체주의로 가는 통로이므로 빨갱이를 처단해야 하는가? 이 소설은 반공적 요소가 있다. 작가의 의도를 차치하고 나는 그렇게 읽었다. 반공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각자가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를 통제하고, 생각을 하나의 틀에 가두려는 이가 누구인지, 권력의 집중을 어떻게 견제하는지,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1984가 내게 남긴 질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마름을 거부하는 미스코리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