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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pr 19. 2020

글 잘 쓰고 못 쓰는 기준




 글솜씨는 대체 무엇일까? 내 브런치 계정을 알고 글까지 읽는 지인은 다섯이 안 된다. (평생의 지인이라면 몇 천 명이 넘겠지만, 지인의 기준은 현시점에서 알고, 연락을 이어나가는 사람이다. 그러니 극적으로 적은 파이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내 글솜씨를 칭찬한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아는 사람을 소개할 때 몇 가지 특징을 꼽는다. 한국에서는 외모, 경제력, 직업, 나이 등이 주로 사용된다. 호주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사회적 위치 밖의 영역에도 관심을 준다. 몇몇 지인은 내 글솜씨를 강조한다. 소개가 소개를 부른다. 누군갈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가족이라도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새로운 정보가 오면 평가를 갱신한다. 내 경우 인물 평가를 재고할 정보로 글솜씨가 쓰인다. 결국 내 글을 읽어본 사람은 몇 없지만, 지인의 대부분은 나를 글 좀 쓰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수잔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말했고,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했다. 무비판적 사고는 의도 없는 악으로 이끌 수도 있다고. 두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키워드는 "비판적 사고"다. 사람들은 비판적 사고를 잃어간다. 나를 향한 평을 보면 알 수 있다. 읽진 않았는데 남들이 그렇다니까, 혹은 읽었어도 분량과 아카이브와 몇 가지 비일반적인 어휘를 근거로 타인의 평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한나 아렌트와 수잔 손택이 무덤에서 한숨 쉬고 있다. (장례 문화가 달라서 세계를 순환하거나 뼛가루로 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웃기는 가정을 한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를 봐도 알 수 있다.


"매달 1억씩 주면 군대 다시 간다 vs 안 간다"

"2년 동안 집 밖에 못 나가지만 10억 받으면, 한다 vs 안 한다"




나도 웃기는 가정을 하나 하겠다. 내 글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잘 썼다 vs 못 썼다. 자기 비평에 객관성이라는 말이 터무니없어서 위의 가정과 동류로 보인다. 그러나 가정은 새로움을 불러오고, 활기를 주고, 흥미로 이끈다.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뭔가가 나올 수 있단 말이다. 상황에 몰입해서 대답한다. 두 가지 기준에서 대답하겠다. 평소에 글을 안 쓰는(대부분의) 사람을 포함한 상황을 가정하자면, 상위권이다. 영어로 Good, 일어로 이이, 중국어로 하오. 그렇담 일상적으로 글을 써오는 사람들 사이에선? 대답하기 모호하다. 왜냐면 글은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환자 일지 쓰는 의사, 가사 쓰는 작사가, 장부 쓰는 자영업자, 리서치하는 문화재 전문가(와이프), 시 쓰는 시인 등. 글이라는 게 장르를 떠난 모호한 영역에 있다. 그럼 내가 답을 못 하지. 시인보다 시 못 쓰고, 와이프 보다 문화재 리포트 못 쓰고, 작사가 보다 가사 못 쓰고, 의사보다 환자 일지 못 쓴다. 그들의 영역에서 나는 무용하다. 한자어 풀어쓰면 쓸모없다고.




수영으로 치자면 자유형에 가까운 글쓰기가 수필이다. 일반적으로 "너 수영 잘해?"라고 물을 때 평가 기준은 가능한 영법의 개수가 아니라 (뭐가 됐든) 얼마나 오래, 빨리 헤엄칠 수 있냐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필을 기준으로 놓고 말하는 게 좋을듯하다. 얼마나 군더더기 없이, 의도에 부합하는 표현을 사용해서 주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것이냐를 묻는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대답하기 애매하다. 이쯤 되니 읽는 사람들 놓고 장난치는 것 같다(사실 그렇다). 군더더기라는 게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잉여는 메시지를 갖고 있다. 그 잉여의 메시지가 수신인에겐 작품이고 아름다움일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나 다른 에세이를 보자. 그는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 자료가 원래 갖고 있는 목적 밖에서 본인의 글감 혹은 영감을 찾는다. 사진에서도 마찬가지다. 벤야민은 사진 비평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단순한 기록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상대적으로 덜 예술적으로 보이는) 앗제나 잔더의 사진에서 위대함을 논한다. 그러니 내 글을 받는 수신인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 밖에서 뭔가를 보고 느낀다면 그것은 좋은 글이다. 평가의 상대적으로 좋은 글 나쁜 글 논쟁이 무의미하다. 그러니 객관적 평가 또한 무의미하다. 모두에게 통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당신도 빡쳤겠지.




잉여의 예술성을 논외로 하고, 하고자 하는 말을 그대로 쓸 수 있는 능력만 놓고 보면 어떠한가? 나쁘지 않다. 문장을 짧게 쓰고, 문단의 중심 주제를 벗어나지 않기만 하면 된다. 나는 짧게 쓰고(문장 안에서 오독 가능성을 줄이고), (잉여를 의도하지 않은 경우)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심을 잡는 것은 퇴고가 있어야만 가능한 영역이다. 퇴고 없이는 정돈된 맛이 없다. 퇴고를 한다는 가정 하에 의도에 부합하는 글을 쓴다.




좋은 글이란 기준은 애매하다. 위 문단에서 글의 기준으로 든 게 '기술적 글쓰기'이다. 글쓰기에 좋은 글쓰기 기능공 시험이 있지 않다. 기술적으로 깔끔하지 않아도,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되려 내가 위대하다고 느끼는 글의 다수는 기능공 글쓰기와 척을 졌다. 필요와 불필요는 나누는 것, 그것은 기준의 좁음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취지에서 위대함은 대체로 의도적 잉여를 쏟아낸다. 내가 괄호를 좋아하는 이유다. 불필요를 가장한 필요, 되려 중심에서 벗어났으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지나침(과잉)은 어떤 기준을 상정함으로. 기준이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며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작가는 과잉을 쏟아낸다. 그러니 기능공 기준에서 잘 쓰고 못 쓰고를 나눌 때 거리낌이 있다.




기능공 대결을 벗어나면 사유의 깊이가 좋은 글의 기준이 된다. '한 주제를 얼마나 깊고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조금 돌아가더라도 계속 쓰다 보면 누군가의 사유의 양, 사유의 토대가 보일 수밖에 없다. 대상을 두루 바라보려면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 것만으론 부족하다. 이성의 끝판왕, 연역적 사고의 완성형이라 스스로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보완하고 다른 시각을 만들어 비교한다면 말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철학자형은 그리 많지 않고, 기존에 나와 있는 소스와 비교해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 여기서 하고픈 말이 나온다. 결국 책(사유 과정을 거친)을 많이 읽고, 글이나 대화, 토론 등을 통해 읽은 내용을 많이 소화한 사람이 사유할 준비가, 혹은 그 과정에서 사유한 사람이 된다. 내가 기준으로 삼고 싶었던 것은 이 사유의 깊이었다. (단언 조로 문장을 끝내면 그것이 진실이 되기 때문에 나는 잉여를 사용해 숨 쉴 공간을 열어둘 것이다. 이 문장만 보면 기능공적 측면을 배제한다는 것이 된다. 기능공적인 측면을 실제 삶에서 평가 기준으로 삼고, 중요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 내 과거의 행적은 모순이 된다. 여전히 기능공 글쓰기는 중요하다. 다만 이번 글에선 사유의 깊이를 중심으로 좋은 글을 탐구해보고 싶었다. 이번 탐구는 기능공 측면(Form) 10%, 사유 측면(Contents) 90%의 토대 위에 있다)




많이 돌아왔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이 누군가의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말솜씨가 부족한 이는 상대가 알아주지 못할 때 느끼는 박탈감을 느낀다. 나는 아니다. 왜? 일부러 짜증 나게 만들었으니까. 짜증도 있는 한편 그런 짜증 과정만이 줄 수 있는 내용과 감정이 있다. 그 핵심을 위해 피치 못하게 이런 방식을 취했다(고 봐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유의 깊이가 글 솜씨의 기준이라면 나는 한참 부족하다.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이 말을 하면서 '더 많이 읽어라. 더 많이 써라. 더 많이 입 밖으로 꺼내서 사람들과 생각을 나눠라.'라고 자신에게 말을 건네려는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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