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이 품은 고민의 무게는 시대적 맥락에서 봐야 한다.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은 시대를 초월하나, 기독교 밖을 상정할 때 필요한 용기의 무게가 다르다. 중세의 박해보다야 덜하겠지만, 19세기 러시아에서 기독교 척지기는 보통 일이 아니다. 신의 권위에 의문 품을 인물이 많지 않았다. 고민을 대하는 충실한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이제 현실의 고민을 마주한다.
이번 독서모임의 참여자는 3인이었다. 언제고와 같은 멤버다. 책의 중심 주제인 삶의 의미를 논했다. 저마다 어떤 삶의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을 나눴다.
일치된 내용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00이지 않을까? 정도의 의견이 나왔지만 그 또한 확언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다른 일치점은 톨스토이가 품었던 고민과 고민의 궤적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다들 의미를 찾았고, 신에 의미를 요구했었고, 좌절했고, 대안을 찾았고, 포기했던 경험이 있다.
나도 내가 왜 사는지 모른다. 낙천적인 인간으로 매일 행복을 입에 올린다. 사는 게 즐겁다. 그렇다 해서 즐거움이 삶의 의미는 될 수 없다. 간단한 반례를 통해 입증한다. 더이상 행복하지 않으면 생을 포기할 것인가? 묻는다면 답은 '아니다'다. 행복하지 않아도 삶은 이어진다. 내게 삶은 일종의 당위다. 이왕 주어진 거 책임지고 살아야지. DNA에 녹아 있는 선조의 명령이다. 이 당위에 반응하는 사람은 자손을 남겼을 것이고, 아니라면 대를 잇지 못 했을 터다. 생존이 당위에 대한 복종의 증명이다.
결국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의미는 고정될 수 없다. 고정된 의미를 찾는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그때그때 욕망하는 게 다르다. 00만 있으면 나의 행복은 걱정 없어! 란 생각을 한다. 00을 성취한다. 몇 개월 지나 00은 내 행복에 영향을 끼치지 못 한다. 행동경제학의 많은 실험으로 증명됐다. 내 삶을 한방에 바꿀 거대한 성취는 없다. 의미는 여기에서 저기로 자리를 옮긴다. 예외는 종교다. 종교는 절대적 의미를 제공한다. 의미 탐색의 고통과 귀찮음에서 프리패스다. 이미 차려진 밥상에 수저 올릴 뿐이다. 참 쉬운데 그게 마음처럼 안 된다. 톨스토이 또한 같은 과정을 겪었다.
톨스토이는 결론에서 신을 불러왔다. 완벽한 종교적 신, 보편의 신이 아니라 자신의 신을 소환했다. 이 지점에서 칸트의 도덕률이 떠올랐다. '네가 그에 따라서 행위할 수 있는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마치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칸트 역시 신 없이 도덕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다만 그 신이란 존재는 보편의 신이 아니라 각자의 신이다. 도덕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신이다.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축약해 정리하면 선의 완성이다. 도덕적 삶을, 그러니까 목적 그 자체가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종으로 태어난 이상 고정된 삶의 의미를 갖는 것은 어렵다. 의미는 변한다. 세계적 대문호도 의미를 찾기 위해 이런 개고생을 했는데, 일반인인 우리가 쉽게 찾을 리가 없다. 매 순간 추측할 뿐이다. 절대적 의미가 없다면 그 비슷한 것을 불러올 수 있다. 한 모임원의 대안은 관계다. 친밀한 사람 사이의 관계, 그러니까 가족, 연인, 모임원 등이다. 관계 위에서 즐거움과 활력을 얻고, 그 에너지가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삶을 굴리는 관계가 의미라는 것이다.
나는 관계가 의미란 말에 동의하기도 하고 동의 못 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성장에 타고난 것보다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믿는다. 관계는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영향력을 놓고 볼 때 삶의 의미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다. 다만 온전이 1:1 매칭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관계는 변한다. 연인, 배우자와의 관계는 어긋날 수 있다. 상대를 향한 호감이 이어진다 해도 관계는 깨진다. 관계는 상호적이다. 한쪽의 의지만으로 유지할 수 없다. 가족도 깨진다. 관계는 변한다. 그 가변성이 삶의 의미 사이의 대등 부호를 없앤다.
또 다른 대안은 세속적 성취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삶의 의미로 착각하는 것이다. 한국엔 시민이 공유하는 성취의 기준이 많다. 내 집 마련, 강남 입성, 스카이 진학, 대기업 취직, 건물 취득 등. 그 목적을 삶의 의미라 혼동하기 쉽다. 세속적 성취는 구체적이고, 공유하는 동지가 많다. 세속적 성취는 분명한 기준을 제공하나, 완벽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이것만 이루면...' 세속적 성취로 세상이 바뀔 것 같지만, 대체로 그 성취는 소명 의식을 불러오지 못 한다. 삶의 의미 또한 제공하지 않는다. 자신과 회사를 동일시하며 살아온 샐러리맨이 은퇴 후에 그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는 것이 하나의 예다. 종교만큼 혼동하기 쉽지만, 현세에 좌절이 온다는 게 다르다.
결국 칸트와 톨스토이로 돌아간다. 어떤 성취가 삶의 의미가 아니라 태도 그 자체가 의미가 된다. 그 마음가짐, 매일의 태도가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닐까? 정한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일상이 목적(의미)이 된다. 훨씬 합리적이다.
그럼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태도를 고수하는 게 의미가 되는가? 칸트와 톨스토이처럼 정의로운 삶, 인격 완성을 하루하루 실천하는 것인가? 그 완성된 인격이란 개념은 변한다. 그러니까 그 태도를 논하는 것도 가변적이다. 통 찾을 수가 없다. 삶의 의미는 꾀꼬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