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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Feb 09. 2024

근사함은 근사하다


"~가 근사하네요" 어딘가에서 들려온 말에 귀가 솔깃했다. 능력 개발 조언서는 말한다. 발전에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그래, 한 가지 일에 집중해 보자! 다짐한 나를 현대 사회가 가만두지 않는다. 컴퓨터로 사업 계획서 쓰고, 핸드폰으로 게임하며, 유튜브 뮤직에서 음악 듣는다. 사건은 시기와 맞물려 공명한다. 근사하단 표현은 삼십몇 년 울림을 주지 못 했다. 자극의 폭포 아래 정수리 지압 중이다. 누군가의 말이 소음을 뚫고 귀에 닿았다. 서른다섯이 됐다. '근사함'이란 기표가 내게 왔고, 의미가 되었다.





표현을 곱씹었다. 근사하다. 근사하다. 음, 그 말 자체로 근사하다. 일전에 언어란 기표의 위력에 대해 말했다. 기표가 기의를 집어삼키는 경우가 생긴다. 이는 시뮬라시옹이다. 가상이 현실을 전복한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 여기서 행복은 기의, 웃음은 기표다. 근사하다는 관념이 기의고, '근사함'이란 한글말은 기표다. 나는 기표에 반했다. 정말 근사해. 자연히 내가 저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길 희망했다. 내 입이 근사하다는 말의 출처가 된다니!





비슷한 맥락으로 '아름답다'가 있다. 아름답다는 말은 듣는 사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표현 대상이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경우다. 너의 배려가 아름답다. 너의 이타성이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말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아름다운 기표다. 아름다운 기표 Ver.2가 근사함이다. 근사하다는 표현을 쓰는 근사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여기서 기표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것은 나의 무지다. 그간 근사하다는 표현의 뜻을 잘못 알았다. 내게 근사함은 우아함과 동의어로 쓰였다. 잘 차려진 환경이나 사물을 지칭할 때도 그렇다. 근사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찾았다. 분명한 의미를 위해 설명을 타고 올라갔다.



근사하다: 그럴듯하게 괜찮다. 

그냥 괜찮은 것이 아니고 그럴듯하게 괜찮다. '괜찮음'은 보통과 좋음 사이에 있다. 수치화 시키자면 51~60점 정도다. 게다가 그럴듯하다는 전제가 붙었다. 약간의 긍정도 전제가 달린 상태로 칭찬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럴듯하다는 전제를 찾아본다.



그럴듯하다: 제법 훌륭하다.

제법 훌륭하게 51~60 사이에 위치했다는 의미다. 괜찮음 앞의 '그럴듯하게'란 수식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51~60에 있는 것을 확신하지 못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 둘째, 일반적 괜찮음보다 나은 수준, 그러니까 61~70 사이에 있다는 의미. 이 수치는 한국말을 그간 사용해온 유저(나)가 실사용에서 체감한 것으로 모두의 경우와 다를 수 있다. 어느 쪽 의미이든 시원찮은 칭찬임에 분명하다.



제법: 수준이나 솜씨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다.

여기서 제법의 정의는 마찬가지로 보통 보다 위에 있다는 의미다. 훌륭함은 보통의 한참 위에 있는 말로, 이 경우엔 훌륭함의 정도를 다소 경감시킨다. 




요컨대 속 시원한 칭찬이 아니다. 근사하다의 첫째 의미인 '거의 같음'과 맥을 같이 한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어떤 상태를 뜻한다. 의미가 근사하지 않다. 용례는 사전적 의미와 다르다. 상대의 고상한 노력과 우아한 결과물을 칭찬하는 용도로 쓰인다. 그것이 내가 그리고 많은 이들이 쓰는 표현의 의미다. 그러던 중 한 블로거의 단어에 대한 고찰을 봤다.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내용은 이렇다.




근사(近似)는 거의 같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근사하다는 말은 단순히 멋지고 좋은 게 아니라 '닮아서' 좋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제가 아는 누구와 닮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 참 근사해요"라는 뜻이다. "당신 참 근사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기대했던 모습과 참 비슷해요"라는 뜻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날 때 공통점을 찾고 싶어 한다. 그것은 근사함을 찾으려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근사해지기 위해서다. 우리는 서로가 근사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삶이 근사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





두 가지 장점이 있다. 동작성과 현실성. 사물의 형태가 고정이 된 것이 아니다. 대상에 동작성을 부여한다. 백 프로 부합하는 이미지는 존재할 수 없다. 이데아가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유토피아가 없는 세계란 뜻인 것처럼 말이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 그 자체야!라는 말은 현실성이 없다. 칭찬에 객관성을 넣어 진실로 들리게 만든다. 최근 들뢰즈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들뢰즈의 말이 이 해석에 근거가 된다.



'동일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영원불변하고 하나로 굳어진(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계 속에서 일시적으로 그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말로 '준안정상태'다. 신체는 끊임없이 변한다. 세균 등 타자에 의해 살고 있고, 다양한 균형에 의해 일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순수한 건강이란 없다. 무수한 시소게임 속에서 그 모양이 임시로 고정되어 있는 '준안정상태'다. 근사함은 포스트모던적 칭찬이다. 변화를 분명히 인식한다. 대상이 가진 에너지의 흐름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나라는 인간의 삶에 들어와 어떤 이미지와 중첩 작용 중이란 뜻이다.





세계는 시간적이며 모든 것은 운동의 한가운데 있다. 어린 시절 방방 뛰어다녔다. 점프해서 천장을 손가락으로 치고 싶었다. 발을 쭉 펴고 손을 휘두른다. 손가락 끝이 천장에 가까이 닿았다 다시 멀어진다. 그러니까 손가락은 근사했고, 멀어졌다. 근사함은 나의 뜀박질을 설명한다. 근사하다는 말은 운동의 한가운데 있는 생명력을 칭찬한다. 유한한 삶에서 이상 추구를 위한 노력이, 그 에너지가 근사함을 만든다. 곱씹으니 근사하다는 말은 정말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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