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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Dec 17. 2016

술, 세월의 증인

'악마는 너무 바빠서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에 술을 보낸다.' 탈무드의 격언이다. 술병 스티커는 음주가 간경화와 간암을 일으키고, 임산부의 기형아 출산율을 높인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술은 없어져야 할 만악의 근원이다. 악마는 인간성의 타락을 형상화한 존재인데, 인간에게도 같은 길을 걸어가길 권유한다. 모세는 인간의 추악한 면을 끄집어내는 술의 악마성을 인식했다. 현대 한국 사회는 술로 인한 피해의 경험으로, 국내에서 판매하는 주류에 경고 문구를 박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건대입구역. 많은 청춘들은 지칠 줄 모르고, 군중은 줄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풀린 눈으로 휘청거리며 도보를 누비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려 욕설 섞인 소리를 지르고, 어떤 이들은 정신 끈을 잡기 위해 애쓰고, 어떤 이들은 이미 정신을 잃고 친구의 등에 업혀 있다. 모세가, 한국 정부가 그렇게 경고했건만, 그들의 말은 효력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악마에 사로잡혔고, 잘못을 반복한다. 


 고등학생 티가 남았던 시절,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늘씬한 몸매와 예쁜 얼굴, 여자친구가 가져야 할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여자였다. 잘생긴 게 최고고, 늘 짜릿하다는 한 미남배우의 말마따나, 만남은 짜릿했다. 짜릿함은 빠른 권태와 위기를 가져왔다. 호텔에서 지인이 깜짝 이벤트를 했는데, 친구와 조력자로 나섰다. 이벤트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친구와 편의점에서 술을 사 호텔로 돌아왔다. 그 날은 나의 기념일이기도 했다.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한 시점에, 다른 커플의 행복도우미가 됐다. 행복 주체에서 객체로 전락한 신세를 탓하며 술을 마셨다. 술은 여자친구와 대화를 해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이 심어줬다. 이성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고, 후회로 가득찬 이튿날을 보냈다. 


 광우병 시위막던 일경(일병) 시절, 휴가를 받았다. 3,4 분만에 끝난다는 3박 4일 휴가를 즐기기 위해 많은 계획을 짰다. 그중 하나는 관심녀와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느지막이 만나 둘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 근처에서 만났는데, 우리 집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락부락하고 냄새나는 전우들과의 생활이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술자리는 쓸데없이 긴장됐다.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술이 빨리 긴장을 풀어주길 바랬다. 긴장 대신 정신 자체가 풀렸고, 술집 화장실에서 변기를 잡고 하룻밤을 보냈다. 


 과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사자성어의 훌륭한 표본은 음주다. 술의 힘을 빌려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을 때,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할 수 있던 일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할 수 있었으나, 취했기에 할 수 없던 일은 많다. 자신의 책임감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다. 생수를 들이부어도 갈증은 채워지지 않는다. 전날 먹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변기 앞을 서성거린다. 술값으로 얼마를 썼는지 계산하니 속이 더욱 쓰리다. 하루 일과를 생각하면 걱정스럽기만 하다. 알바 담당자에게 오늘 일 못 나갈 것 같다고 연락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소주는 한 잔, 와인은 2/3병, 맥주는 500ml 두 잔. 지금도 술자리는 적지 않지만, 대개 이 기준을 넘지 않는다. 멀쩡하게 집에 돌아와 수면을 취하고 다음날 일과에 지장을 주지 않는 안전선이다.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진 여자친구의 말에 모든 이가 유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이를 하나 둘 먹으며 합리적으로 살자는 생각이 커진다. 술은 기분 좋아지려 먹는 것이고, 기분이 좋아졌다면 그 이상은 필요 없는 것이 된다. 더 마셔 봐야 돈 쓰고, 몸 상하고, 고생할 뿐이다. 더 시킬까?라는 친구에 물음에 이걸로 충분하다 대답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정도를 넘어 음주하는 사람을 흔히 개라 부른다. 개같았던 시절을 돌아본다. 내게 술의 두 번째 본질은 젊은 날의 치기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그리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날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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