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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200만 원이 꿈이던 시절이 있었다

by 띤떵훈



볼더링을 마치고 멜버른 시티로 돌아왔다. 주차를 마친 뒤, 오픈카의 뚜껑을 천천히 닫았다. 가볍게 스시롤 하나로 허기를 달래고, 은행에 들러 회사 계좌 개설 서류에 사인했다. 일련의 절차를 마치고 오피스로 올라갔다. 공용공간에서 더블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그걸 머그잔에 담아 조용히 팀 룸으로 들어섰다.



머그잔에서 커피의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져 올 즈음,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인생을 살고 있지?’



별다른 일 없는 하루였지만, 어쩐지 낯설었다. 자동문이 열리고, 익숙한 카펫 위로 발을 내디뎠는데, 마음 한 구석이 불현듯 울렸다. 지금 내 삶은 예전엔 상상하지도 못했던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출근 강제도 없고, 해야만 하는 회의도 없다. 원하는 사람과 일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일한다. 시간이 내 손에 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건 어린 내가 그리던 삶이라기보단, ‘저런 삶도 있구나’ 하고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여겼던 누군가의 삶에 더 가까웠다. 나는 그저 한 달에 200만 원을 벌고 싶었다. 그것이 꿈이었다.



기억을 더듬자 15년 전 즈음의 장면이 떠올랐다. 잠실 유니클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다. 한 달 130만 원을 벌었다. 그중 50만 원은 저축했고, 25만 원은 월세로 나갔다. 10만 원은 교통비, 5만 원은 공과금. 생필품을 사고 나면 하루 만 원 남짓의 가처분소득이 남았다. 내게 허락된 여유의 크기였다.



데이트는 석촌호수를 걷거나, 집에서 함께 요리를 해 먹는 정도였다. 특별할 건 없었지만, 그 나름의 정겨움이 있었다. 카페에선 3천 원짜리 커피를 시키고 몇 시간을 버텼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다기보단, 무언가를 지킬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유니클로 B품 대신 정가 제품을 사고 싶었고, 10만 원 넘는 옷도 가끔은 입어보고 싶었다. 호텔에서 하룻밤 머물러 보는 것도 바람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게 200만 원이었다. 그게 내 기준선이었고, 꿈이었다.



어릴 적 나는 그렇게 단순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그조차 쉽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대학 졸업장도 없고, 기술도 없고, 배경도 없었다. 가진 건 몸 하나였다. 나는 그 몸으로 청소를 했다. 수치심은 없었다. 오히려 감사했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스스로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큼 고마웠다.



청소를 하면서 이어폰으로 책을 들었다. 매년 100권에서 150권을 들었고,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가치투자, 인간 심리, 역사, 철학 같은 주제들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쌓였다. 리디북스의 청취 모드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일하면서 공부했고, 공부하면서 삶을 다시 설계할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을 통해 사업의 구조를 자연스럽게 익혔다. 누가 친절히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고, 정리된 교재를 본 것도 아니었다. 그냥 들으면서, 몸으로 일하면서, 흘러들어왔다. 투자할 기회가 왔고, 나는 그것을 붙잡았다. 조금씩 주식을 사고, 수익이 생기면 다시 투자했다. 그렇게 공부는 수익이 되었고, 수익은 삶을 바꿨다.



지금의 삶은 그런 시간들의 합이다. 파트너는 시민권자였고, 나는 영주권을 얻었다. 함께하는 친구들과 사업을 하면서 고정 수입이 생겼고, 사업 수익은 더 큰 투자로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환경이 내게 유리하게 맞물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능력이라기보단,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본능에 가까웠다.



과거를 돌아보면 변화는 제법 크다. 성남 달동네의 오래된 주택에서 멜버른 도심 오피스로. 카페를 전전하며 작업하던 때도 있었고, 오피스 없이 시작한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내 이름이 걸린 팀 룸이 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있다. 나이만큼이나 환경도 성숙해졌다.



그렇다고 불안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의 주요 수익 구조는 한 브랜드에 집중되어 있다. 위험 분산이 되어 있지 않다.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수익원을 나누고, 구조를 더 안정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기반이 단단해지면, 본업이라 여기는 주식 투자에 다시 집중할 계획이다. 찰리 멍거의 말처럼, 부의 궤도에 올라탔을 때는 끝까지 매달려야 한다. 그 궤도를 지키는 것이 지금 내 과제다.



이런 인생은 운이 만들어줬다. 파트너를 만난 것도, 청소 일을 하게 된 것도, 책을 들으며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좋은 친구들과 일하게 된 것도. 하나하나 따져보면, 다 때가 맞아준 덕분이다. 소리 없이 다가왔고, 소리 없이 떠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무언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커피는 다 마셨다. 지금은 위스키를 한 잔 따른다. 글을 쓰는 손 옆에 놓인 유리잔. 잔에 담긴 불빛이 조용히 깜빡인다. 오늘 하루도 지나고,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커피의 따뜻함과 위스키의 묵직함이 교차하는 저녁. 내가 살고 있다는 실감은, 이런 순간에 온다.



내가 이런 인생을 산다.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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