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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apah 중입니다

by 띤떵훈



블로그에 글을 쓸 때 항상 '메모'란 제목을 단다. 그 뒤에 글을 쓴다. 그래야 부담이 줄어 글이 잘 나온다. 가끔 키보드가 영문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때 메모를 타이핑하면, ‘apah’란 단어가 나온다. apah. 자음과 모음이 주춤주춤 걸어가다 끝에서 한숨 뱉는 느낌. 메모는 아픈 것일까? ‘아파’라는 발음과 겹치니, 괜히 그런 듯싶다. 물론 전혀 관계가 없는 조합이다. 그렇다고 해도,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건 글쓰기의 숙명이다. 의미 없음이 글쓰기의 시작이자 종착이다.



왜 메모는 아픈가? 내 모든 메모는 자가진단이다. 자기 관찰, 자기 비판, 자기 치유. 그리고 그런 ‘자기’들의 무대 뒤에는 관객 없는 병동이 있다. 이 단어의 조합은 우연히 발생한 해프닝 같지만, 어쩐지 내 무의식이 나를 놀리려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아프냐?’고.



알파벳 조합을 좀 더 들여다보자. 사실 apa보다 apah가 훨씬 아프다. 마지막의 h는 음소가 아닌 감정이다. 아파- 하고 장음을 내면, 보통 두 가지 경우다. 진짜 아프거나, 아주 진짜 아픈 척을 하거나. 아픈 것을 과장하는 인간의 언어 습관은 역설적으로, 감정을 더 진하게 만드는 장치다. 그러니까 h는 단순한 자판 실수가 아니라, 내면에 잠복한 감정의 여운이다.



만일 이 메모가 물리적 노트에 쓰이는 것이었다면, 의미 부여는 더 쉬웠을 것이다. 자원 낭비니까. 펜 잉크 낭비, 종이 낭비, 지구 아픔. 하지만 온라인은 다르다. 물론 전기와 데이터는 소모된다. 하지만 웹서핑이나 영상 시청보단 덜하다. 그러니까 덜 아프다. 상대적 도덕성의 측면에서 보면, 메모는 가장 무해한 자기 고백이다. 지구도 덜 아프고, 나도 덜 아프다. 그러니 쓴다.



다만 가장 알맞은 비유는 이것이다. 메모는 지금 나의 좌표를 찍는다. 이게 문제다. 나의 현재를 폭로한다. 메모는 ‘팩트폭행’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오늘도 계약 안 했네?’ ‘왜 그 사업 안 진행하고 있어?’ ‘너 진짜 시스템 만들고 있는 거 맞아?’ 아니면 이렇게 더 직접적일 수도 있다. ‘너 그냥 카페에서 논 거잖아.’ 정신차리라는 말은 메모가 가장 잘 아는 문장이다. 다만 나는 나에게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자신에게 다정하다. 팩트폭행도 솜방망이다. 그러니 메모는 아프지만, ‘살짝 아프다’. 귀여운 통증, 고통을 덜어주는 형태로 위장된 고통.



이쯤에서 진짜 헛소리를 해보자. 헛소리도 리듬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보코프가 말했듯, 리듬 없는 산문은 산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커피 이야기로 돌아가자. 지금 마시는 음료는 오늘 아침 두 번째다. 첫 번째 음료는 일어나자마자 서재 옆에서 페퍼민트로 우린 티다. 무인도에 티를 들고 가야 한다면 나는 티백보다 덩어리째로 나오는 제품을 택할 것이다. 미세 플라스틱이 없기 때문인데, 그건 어쩐지 내 메모와 닮았다. 티백은 눈에 안 보이고 쉬워서 자주 손이 간다. 하지만 학습을 통해 안 좋다는 것을 안다. 아무튼 두 번째 커피는 동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나왔다. 나는 진한 롱블랙을 고르며, 이 커피 한 잔으로 무언가를 돌파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이런 커피 예찬론 사이로 문득 ‘시스템’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왜냐하면 나는 놀고 먹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글은 잠시 자본주의의 슬로건을 입는다. 시스템. 부동산, 사업 아이템, 직원, 입지. 나는 이미 아이템은 다 짜놨다. 여러 사업을 같이 하는 동료들은 묻는다. '부동산 찾았어요?' 매번 아직이라는 대답을 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부동산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이다. 사인을 하면 다른 모든 게 자동으로 흘러간다. 근데 그 사인을 못 하고 있다. 현재 나와 있는 자리들이 마음에 100프로 들지 않는다. 100이 아니라 80도 아니고 70쯤이기 때문이다. 자리가 가장 중요하다. 그렇기에 지지부진하다. 90, 100 기다리다 관짝에 들어갈 것만 같다.



일단 하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공감하고 실현하려 한다. 그런데 6개월째 탐색 상태다. 이렇게 된 거 모든 걸 그냥 때려치워버려? ‘때려치우다’라는 말도 참 아프다. 거기엔 짜증, 회의, 무기력, 자유의지가 다 들어있다. 물론 그럴 순 없다. 책임감 있는 어른이고, 함께 하는 이들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위해 나는 움직여야 한다. 이런 감정의 물결을 어쩔 수 없이 메모에 담는다. 그러다 보면 결국 무의식이 가장 신경 쓰는 걱정으로 향하게 된다. 그건 나도 막을 수 없다. 통제를 벗어나면, 자아는 결국 아픔으로 간다.



그러니까 메모는 결국 아프다. apah. 이 단어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무의식이 만든 필연이다. 아파서 쓰는 건지, 쓰다 보니 아픈 건지 모를 글이 쌓이고, 그 글은 다시 나의 현재를 구성한다. 나는 내 글 속에서 현재를 살고 있고, 그 현재가 아프다. 하지만 또 이상하게도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알아차리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 아픔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각 없는 아픔, 침묵하는 고통.



그런 의미에서 ‘apah’는 아프다, 가 아니라 ‘아픔을 직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메모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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