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띤떵훈 Apr 11. 2017

 휜 표지판

 집 앞 도로는 얼핏 평범해 보인다. 양 사이드에 주차할 수 있고, 마주오는 차가 있으면 오가는 운전자 중 하나가 양보해야 하는 보통 넓이다. 한 가지 평범하지 않는 것은, 휘어진 정지 표시판이다. 지나칠 때마다 누구 소행인지 추론한다. 술 취한 아저씨가 새벽에 박았을 것이다. 숙련되지 않은 어린 친구들이 그랬을 것이다 등. 있을 법한 내용으로 스토리텔링 한다. 


 표지판은 둥글고, 빨갛고, STOP 문구가 적혀 있다. 나이가 있는지 등은 굽었다. 표지판은 일 갈 때나 학교 갈 때, 장 보러 갈 때 구분 없이 몸을 굽혀 주민들의 안부를 묻는다. 일본 여관 직원들처럼 습관적으로 반절한다. 차이점이라면 재화 사용 여부인데, 돈 안 내고 과분한 친절을 받는다. 표지판의 잃어버린 40도는 색다른 이미지를 불러왔다. 


 주변 환경에 크게 신경 쓰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부터 표지판의 상태가 이러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처음 동네에 이사 왔던 일 년 반 전부터, 어쩌면 그 후에 바뀐 것일 수 있다. 한 번 인식한 사물이나 사건은 신경 쓰인다. 마치 김춘수의 시 '꽃'과 같다. 특정한 수식이 붙을 때, 보다 선명한 인식이 가능하다. '기둥'이란 단어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앞에 휘어진 이런 수식이 붙으면 다르다.


 사물이 용도와 다른 이미지를 가지면 흥미가 생긴다. 그 사물이 내게 필요한 경우엔 본질이 바뀌면 안 되겠지만, 반대 경우엔 본질이 흐려져야만 의미가 있다. 


 상황을 가정해보자. 물수제비를 할 때 필요한 것은 평평한 돌이다. 핸드폰과 물수제비용 돌의 공통점은 평평함이다. 용도는 전혀 다르다. 핸드폰으로 물수제비를 하는 사람에겐 다름을 볼 것이다. 관련된 자료나 영상을 찾아볼지 모른다. 일반적인 사물의 본질을 바꿨으니까. 내 핸드폰이 물 위를 걸을 일은 없을 것이다. 기대에 맞는 기능을 해야 한다. 


 집 앞 표지판은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동네에서 서행하는 것, 우회전 차로에서 차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표지판이 있던 없던 달라지는 게 없다. 특별한 역할을 못 했고,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표지판이 휘어지면서 새로운 역할이 생겼다. 친구와 대화 주제가 되어 시답잖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약간의 다름에서 재미를 느꼈다.


 오늘은 쉬는 날이다. 집에 있으면 무기력해진다.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선 문 밖을 나섰다. 표지판이 고쳐졌다. 하늘을 뚫을 것처럼 우뚝 섰다. 90도보다 더 직각이다. 밑동은 대형 볼트로 고정됐다. 세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표지판이 너무 멀쩡하다. 

작가의 이전글 천만 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