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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ug 14. 2017

포인트 적립






오늘도 지정석에 앉아서 노트북을 켠다. 쌓인 포인트를 보고 익숙함의 의미를 돌이켜본다. 




단골 카페 적립 포인트가 3800점을 돌파했다. 커피 한 잔 마시면 70포인트가 쌓인다. 700 포인트가 되면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꾸준한 방문으로 공짜 커피를 5잔이나 마실 수 있게 됐다. 일주일에 이, 삼 일은 카페 가는 날이다. 커피 한 잔 주문한 뒤 안면몰수하고 5 시간 정도 머문다. 진상 고객이지만, 직원들은 익숙한 미소로 방문을 반긴다. 그 미소에 용기를 얻어 포인트 카드 찍고, 학생 할인까지 받는다. 시키는 메뉴는 한정적으로, 더운 날엔 찬 롱 블랙, 추운 날엔 뜨거운 롱 블랙이다. 오늘도 지정석에 앉아서 노트북을 켠다. 쌓인 포인트를 보고 익숙함의 의미를 돌이켜본다. 


익숙한 것이 좋다. 옷장을 열면 비슷한 옷이 가득하다. 레귤러 핏의 옥스퍼드 셔츠, 반팔 무지 티, 펑퍼짐한 바지, 넉넉한 재킷 등. 색만 다를 뿐 복사 붙여 넣기 한 제품이다. 외식을 자주 하는 편인데, 가는 식당은 한정적이다. 짜장면이 먹고 싶으면 코치, 고기가 먹고 싶으면 투다리, 덮밥이 먹고 싶으면 돈돈, 맥주를 마실 땐 노티누리. 기계처럼 특정 알고리즘으로 신체가 움직인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정해진 루트로 발길을 옮긴다. 인도네시안 펍, 노티누리에 가면 직원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반겨준다. 그들은 매 방문마다 친근함의 표시로 서비스를 준다. 공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최고의 쳇바퀴다. 


인간관계는 한정적이다. 어제 본 친구와 주말 식사 약속을 잡는다. 그렇다고 낯선 이를 경계하고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색다른 역사를 갖고, 모르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물과의 대화는 흥미롭다. 어제는 친구와 카페에서 만났다. 친구는 낯선 인물과 같이 있었는데, 내게 그를 소개했다. 인사해 이 친구는 영화감독이야. 매튜는 29살이고, 4개국의 피가 섞여 있고, 영화감독이고, 예술 석사고, 지금까지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현재 신작 트레일러 제작 및 후반 작업 중이고, 그 작품을 2달 뒤에 개봉할 예정이다. 박찬욱과 홍상수의 팬인 그와 30분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끝에 페이스북 아이디를 공유했다. 앞으로 만날 것 같지는 않다. 


한 연구는 말했다. 반복 활동이 뇌기능 저하를 초래한다고. 새롭지 않은 것은 도태된다는 진리에 힘을 싣는다.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에 무릎 꿇고 가끔 익숙지 않은 것에 도전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온다. 역시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새로움이 주는 유익함을 통감하는 한편,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을 쫓는다. 4년 넘게 산 멜버른이지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되려 2개월 차 워홀러가 나보다 많이 안다. 필요를 느끼지 않는 곳에 철저히 관심을 끊는다. 핸드폰 지도가 많은 것을 알려주기에 불편이 없다. 멜버른은 커피로 유명한 도시다. 지역 카페엔 실력 있는 바리스타가 넘친다. 세계 대회에서 1등 한 아무개 씨도 이 도시에 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그가 만드는 커피를 언제든 맛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대신 포인트 카드 찍고, 알바생들이 대충 만든 그저 그런 커피를 마신다. 


돌아갈 곳이 없다. 그래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원하는 것인지 모른다. 타국 생활 호봉이 올라가며 한국에 설 자리가 없어진 것 같았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정신이 표류한다. 떠다니는 나를 잡아끄는 것은 반복되는 패턴이다. 그곳에 익숙함이 있다. 새로움이 주는 유익함에 앞서 익숙함에 주는 안정감에 감사를 표한다. 덕분에 유목민 신세를 면한다. 결국 포인트를 적립하는 행위가 내게 있어 오리의 발길질인지도 모른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정신이 표류한다. 떠다니는 나를 잡아끄는 것은 반복되는 패턴이다. 그곳에 익숙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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