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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ug 24. 2017

뱀, 너무 길다




둘로 접은 사랑의 편지가 꽃의 주소를 찾고 있다. ― 쥘 르나르, 「나비」


감성 글에 묘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 반대로 잘 써서 나를 납득시키면, 그 글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아무것도 아닌 나의 평가를 받는다고 그들이 좋아하진 않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형식상 파격이라 불리는 글들도 마찬가지다. 위의 쥘 르나르의 뱀이나 나비를 보고 감동받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을 쓰고 싶었다. 누구나 쓸 법하지만, 저 글을 '시'라고 천명하며 출판한다는 것은 아무나 못 하는 일이다. 문장 자체보다 그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배경을 알고 감동받는, 모더니스트 작품과 맥을 같이 한다. 다만 누군가의 모방이라면 파격이란 수식을 뺏는다. 파격은 최초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나는 더 이상 파격일 수 없다. 여러 방식으로 글을 쓰는 실험을 하고 싶다. 그리고 파격이란 수식이 어울리는 사람이고 싶다. 다만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파격은 제 2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제 1이 아니면 의미 없다는 뜻이다. 혹은 파격을 수용하고 더 큰 모험을 한다면 맥락은 비슷하나 다른 제 1의 파격이 된다. 보통 파격의 창조자는 천재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아는 범위 내에서 사고한다. 학습하고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의견을 내는 이유다. 같은 학습을 받고서도 차원 위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남들이 하지 못 하는 생각이다. 결국 최초는 대개 천재의 영역이다. 나는 천재가 아니라 파격이 아니다.


천재가 아니라 슬프다. 남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내가 최초라 여기는 모든 것은 이미 세상 빛을 봤다. 결국 나는 특별할 수 없다. 너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질 것 같은 대사, '모두가 소중하고 가치 있다.' 그러나 모두가 특별하지 않다. 지식과 파격의 세계에서 선민의식을 갖고 살 수 없다. 삼일 밤낮을 달려도 누군가의 한 걸음일 뿐이다. 내 아이큐는 100 정도, 세상 사람들 모두를 일렬로 세워놓고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을 뽑으면 내가 있다. 세상의 주인공이었는데, 이제 아니다. 남들에 비해 특별히 잘하는 게 없다. 설령 소질이라 불리는 게 있어도 다른 소질 있는 사람들 사이에 놓으면 꼬리 부분일 테지. 


부동산 가치 매기는 걸 전공으로 하는 학과가 있다. 졸업하면 높은 연봉,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전공할 공부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나만의 어떤 것을 만들 수 없다. 부동산 가격 매기는 행위에 파격이 있을 수 없다. '오 이 벽돌은 한국제니까 기존 것 대비 500배 이상의 가치로 산정할 거야.'라고 말하면 누구의 이해도 받을 수 없다. 내 생각 범위에 있는 파격은 파격을 위한 파격뿐이다. 세상엔 많은 분야가 있으니 거기서는 특별할 수 있어. 그 분야의 천재가 되고 파격을 행하는 거야. 말도 안 된다. 세계 인구가 100명, 1000명인가? 각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열쇠 따는 열쇠장이 분야도 수 백만, 천만 명이 있다. 내가 열쇠 왕이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 오우 나는 역시 피카소급이야 라고 말하겠지만, 우리 동네의 파격은 우리나라의 파격은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파격이라도 세계에선 파격이 아니다. 지구 밖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지구의 파격은 그들에게 한낱 과거, 평범이 된다. 결국 누구도 파격이 아니다. 쓰다 보니 기분이 풀린다. 이 세상의 누구도 파격과 천재가 아니니까. 나도 안 되면 너희도 안 돼. 


그러고 보면 왜 파격을 추구하려 했을까? 파격이 우수한 것일까? 보통 최초가 우등 열등을 떠나 파격은 높게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남들의 평가에 삶의 가치가 종속된 것이다. 만약 나의 파격을 인정해줄 누군가가 없다면 별 필요 없는 파격이다. 무인도에서 파격을 꿈꿀까? 세상에 나 혼자 남는다고 가정한다. 그 상황에서 내가 1억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문학 천재가 된다고 가정한다. 시와 외설을 조합한 새로운 문학 장르인 시부랄을 만들 능력이 있다. 인류에서 시부랄은 센세이션이고 10세기를 대표하는 문학이 될 요소가 있다고 해도, 만들 필요를 못 느낀다. 평가해줄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결국 나에겐 남의 평가가 중요하단 것이다. 나의 글쓰기가 나의 만족을 위한다고 말해도, 결국은 누군가의 반응이 없으면 없어질 취미다. 고매한 척 해도 실은 속물이다. 그러나 속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이렇지 않을까? 하긴 이런 종속적 가치관이 천재가 될 수 없는 증거 중 하나일 수 있다. 


글을 쓰며 어느샌가 천재와 파격을 동의어로 쓰고 있다. 되려 둔재여서 할 수 있는 파격도 있을 텐데. 이런 편협함 보소. 평범함이 싫어 쓰는 글에 너무나 평범한 사고 체계를 보였군. 벌칙주 마셔라. 카페에서 글 쓰고 있다. 500ml의 와인을 몰래 들고 왔다. 통을 바꿔서 아무도 술인지 눈치채지 못 한다. 벌칙주를 마신다.  





인터넷에서 누군가의 시를 읽었다. '삶의 인생'이란 표현이 나왔다. 동의어를 종속 개념으로 사용한 형편없는 표현이다. 작가에게 왜 이런 의미를 썼는지 물었다. 뭔가 대답을 했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돼서 재차 물었다. 그녀는 내게 그냥 느끼라고 말했다. 느끼라고 말해도 특별한 것을 못 느낀다. 느끼는 것은 빡침 정도다. 사실 그녀의 오그라드는 단어 조합을 박살내고 싶어 댓글을 적었다. 그러다가 나의 편협함이 실존하는 의미를 못 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기준이 많고 너무 세속화된 걸까? 단지 멋진 척 있는 척 문학적인 척 잘난 척 의미 있는 척하는 '척'의 가면을 박살내고 싶다. 예술의 한계를 설정한 내가 범인의 실례인가 보다. 조금 더 유연하지 못 할까? 나의 세상은 현실 세계를 보는 시야가 좁다. 좁은 게 싫지만 넓게 볼 방법도 없어서, 그냥 삐딱하고 공격적으로 보기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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