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 I get one chicken and one salmon avo please? charge it, please"
캐셔가 스시 두 개를 종이봉투에 담아줬다. 그 위로 냅킨 2장과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플라스틱 간장통을 줬다. 플라스틱은 물고기 형태로, 끝에는 빨간색 돌려서 여는 뚜껑이 붙어 있었다. 예전엔 신기한 모양이라며 재밌어 했는데, 외국 생활이 길어지니 자연스러운 것이 됐다. 캘리포니아 소재 스시집의 99%는 스시를 판매할 때 꼭 물고기 모양 통에 담긴 간장을 준다. 스시가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가게를 나왔다. 주문을 위해 잠시 빼놓은 이어폰을 다시 귀에 꼽았다. 이어폰에서 호텔 캘리포니아가 나오고 있었다. 백 개가 넘는 곡 중에 하필 이 곡이라니. 외국 생활 초기의 많은 유학생들이 하는 행동이 지명이 들어간 노래 듣기다. 타국 땅에 서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워 어쩔 수 없는 상태다. 순전히 노래가 좋아서 목록에 넣은 것뿐, 이방인 신분을 의식한 선곡은 아니다. 소설 첫 문단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안 따라주는군. 어쨌든 늦었으니 이동하면서 말을 잇겠다.
나는 경계인이다. 내 이름은 신종현, 소설 속 세상에 살고 있다. 가상 세계에서 굳이 열심히 살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이 세상은 개연성이 중요한 곳이라 일을 안 하면 굶을 수밖에 없다. 이게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르겠으나 주인공이란 사실은 만족스럽다. 하긴 내가 가상 세계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건넬 순 있지만, 현실 세계로 넘어갈 순 없다. 결국 내겐 소설 속 세상이 현실이다. 조금 개연성이 떨어지고 소설답게 극적인 사건이나 우연이 빈번한 곳이라면, 노동할 필요가 없을 텐데... 너무 현실을 반영했다.
처음으로 이 세상이 소설이며 내가 주인공이란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전까지는 평범하게 지내왔다. (지금은 특별하단 뜻이 아니다.) 그때 나는 파워전사 봉봉캅을 보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에 들려고 하는 찰나에 마음속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누가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했는데, 귀를 통해 듣는 것은 아니었다. 말을 건 사람은 작가였다.
"종현아 안녕. 놀랐지?"
"오우 시발. 누구세요"
"음 우리 종현이가 욕도 할 줄 아는구나"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런데 누구세요"
"우선 그렇게 입으로 소리 내서 말하지 않아도 돼. 생각으로도 대화가 되거든. 어쨌든 핵심은 그게 아니야. 네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는데, 잘 들어보렴"
그 후에 들은 이야기는 놀라웠다. 요약하면 이 세상은 허구고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란 내용이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이 세상이 가짜라는 것은 상상 못 했다. 마음으로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이런 일도 일어나는데 내가 사는 공간이 소설 속이라는 걸 못 믿을 이유도 없었다. 20대 중반인 지금 그 말을 들었다면 정신병을 의심했을 텐데, 초딩이 뭘 알겠나. 오, 캡이다. 한마디 뱉고 받아들였다. 그 후로 별일이 있었냐 하면, 그렇지 않다. 단지 1 년에 한 번, 잊을만하면 작가가 말을 걸어서 이 세상이 소설임을 상기시켰다. 그가 항상 하는 말은,
"종현아 네가 소설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어. 그냥 열심히 살아. 로또 1 등 당첨되는 기적은 바라지 말고. 나는 관찰자지 신은 아니야"
그럼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이야기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었지만, 사건이 없어도 소설은 진행될 거라고 대답했다. 맥빠지는 소리다. 대화가 끝나고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마음둘 곳 없는 세계에서 사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투덜거렸으나 대충은 알고 있었다. 특별한 것 없는 주인공의 일상을 담아 소설로 만들려면 하나의 장치는 필요하다. 이 경우엔 주인공이 자기 위치를 인지하는 것이다.
가짜 세상에서 노력하면서 살아야 하나? 이 소설 끝나면 내 존재는 없어질 텐데.라고 생각을 했지만, 막 살면 내 손해다. 언제 이 세상이 없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충실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가상 현실이라도 내가 느끼는 부모님의 사랑은 진실하다. 무능력한 작가한테 뭘 바라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하루하루 먹고살게 해주는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을 해야지. 학교 친구들과 빡세게 공부해서 명문대 진학을 노렸다. 매년 뜬금없는 시간에 작가가 말을 걸어왔다. 고3이었던 열아홉은 너무 예민한 시기여서 그에게 성질을 냈다. 그다음 해에 사과했다. 그 외에는 세상의 경계를 넘어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워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작가는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뭔 말을 해도 잘 받아줬다.
작가는 드라마를 좀 봐야 한다. 인생에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 막장 드라마를 보면 하루 건너 사람이 죽고 부자가 되고 적과 육탄전 벌이는데, 내 26 년 인생에 극적인 장면이 없다. 사건이 없으면 천부적인 재능이라도 주던지. 난 또 내 머리가 비상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연출하면 서울대 갈 줄 알았다. 코피 쏟아가면서 공부하고 숭실대에 입학했다. 물론 괜찮은 대학이지만, 소설 주인공이 가기에 너무 임팩트 없는 거 아닌가? 고졸이거나 서울대 출신이거나 해야지, 숭실대는 너무 어중간하다. 노력하는 주인공을 연기했지만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 했다. 공부가 내 장기는 아니었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다. 소설 주인공으로서 자아실현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작가에게 고마운 점은, 인물 설정에서 내 시력을 낮게 잡았다는 것이다. 낮은 시력으로 군대 면제받아서 2년 세이브할 수 있었다. 면제받고 라섹 수술해서 이제는 안경 없이 잘 살고 있다. 그게 큰 사건이라면 사건이랄까. 대학교에서도 별일은 없었다. 공부 머리는 없지만 소설 쓰는 재능이 충만해서 불후의 명작을 써내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특징 없는 주인공이 특별한 재능을 개화해서 성공하는 줄거리는 소설스러웠다. 문예창작과 진학을 자아실현을 위함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은 수능 점수 맞춰서 온 곳이다. 3년 수업 들으면서 습작 쓰다 보니 할 만 했다. '아! 이제부터 소설이 재밌어지겠군. 이 속마음도 지문에 실리겠지? 여기가 티핑 포인트라고 독자들에게 알려줘야겠어'라고 3학년 때 생각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난 시험관 속 침팬지가 높은 지능을 갖게 되고 지구를 지배하는 이야기를 썼다. 기성 작가이자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담당 교수에게 소설을 보여줬는데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오오 21세기 판 무진기행이 탄생했구먼! 혹은 종이를 바닥에 던지면서 이런 형편없는 작품 가져가!라고 말할 줄 알았다. 전자였다면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었고, 후자라면 분노에 칼을 갈게 만드는 계기가 됐을 것이었다. 두 쪽 다 아니었고, 이 소설이 작가로 성공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을 달랠 겸 일 년 남긴 상태로 휴학하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고모 댁에 왔다.
캘리포니아에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인생을 담을 분량이면 분명히 장편이다. 내 삶을 보면 해리포터류의 판타지 장르는 아니다. 평탄하게 흘러가는 걸 보니 행간으로 말하는 신춘문예류의 소설이 아닐까 추측했다. 마치 심사평에 '존재의 파장이 조금씩 부딪치며 균열이 생기고 무력해지고 소멸되고 결국 무너지는 현상을 포착한 작품'이란 코멘트가 달릴 것 같았다. 과제 때문에 억지로 봤던 진지한 비유투성이의 작품은 아니었으면 좋은데. 조금이라도 내 취향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조금 더 유쾌하게 행동할 필요를 느꼈다. 작년에 작가와 대답했다.
"여! 종현이 오랜만이야"
"오우 이게 누구야!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요즘 어떻게 지내요. 소설 잘 쓰고 있어요?"
"뭐 아직 구상 중이야"
"저도 25이에요. 이제 좀 써봐요. 25년이나 기다렸는데 아무것도 못 썼다니 맥 빠지네요"
"네 생각 충분히 이해해. 그런데 나한테는 네 25년이 25분일 수도 있어. 세계가 달라서 시간의 속도도 다르거든"
"알아요. 전에 말했잖아요. 제가 답답해서 그랬어요. 근데 줄거리는 생각했어요? 장르가 뭐예요"
"아직 그것도 구상 중. 네 인생의 어떤 부분을 캡처해서 쓸지, 아니면 인생 전반을 다룰지도 정하지 않았어"
"와... 진짜 단편으로 쓰면 작가님 나쁜 사람 인증하는 거예요"
심심한 내 인생처럼 우리 대화도 별게 없었다. 사실 캘리포니아에 온 건 이유가 구체적인 있었다. 어차피 대단한 사건이 터지는 소설이 아니라면 하루키 소설 주인공처럼 특별하고 쿨하게 그려지길 하는 바람에서였다. 영어 쓰는 모습과, 여유를 만끽하는 자신을 지문에 담고 싶다. 그 안에 약간의 유머를 담으면 더할 나위 없다. 철학 소설만큼은 딱 사절이다. 자아를 찾는 게 아마 주제일 것 같은데, 로캉탱처럼 존재란 무엇일까란 물음에 심취해서 아침 햇살을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내 존재 방식이 증오와 싫증은 아니다. 교수님의 해설을 듣고 그러려니 했지, 내 삶의 태도와는 동떨어졌다. 한가지 두려운 점은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행동을 하던, 작가가 마음대로 편집해서 의미 부여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내 삶을 다루는 소설에 제발 고독, 허무, 실존, 권태 등의 보기만 해도 독서 욕구 떨어트리는 단어가 없길 바란다.
"종현아. 오랜만이야. 너한테는 1년 만이지?"
"오 작가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응 나는 10분 동안 별일 없었어. 그건 그렇고 안타까운 사실을 전해야 할 것 같은데..."
"불길하게 왜 그러세요"
"네 이야기 짧은 단편으로 쓰기로 정했어"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직 이렇다 할 사건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 인생으로 글을 써요"
"그렇게 됐다... 미안하다"
이 이야기는 장편이어야 한다. 짧은 글이라면 내 인생이 아깝다. 그래서 되도록 많은 설정을 말할까 한다. 이런 점에서 내 전공이 빛을 발한다. 2학년 문예 창작 수업에서 체호프의 총이란 개념을 배웠다. 극에 나온 떡밥은 무조건 회수되어야 한다. 총이 나오면 꼭 쓰는 장면이 나와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중산층이라고 말하면 그 배경과 중산층인 이유에 대해 후술 해야 한다. 내가 스시를 먹는다면 음식이 스시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작가가 이야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면 길게 써야 한다. 나는 모카라떼에 초콜릿 파우더와 시나몬 파우더를 뿌리고 그 위에 휘핑크림을 올려달라고 말했다. 최근엔 6개월짜리 바리스타 코스 듣고 있다. 내 신발은 나이키다. 내 가방은 200만 원 짜리다. 아르바이트생이 10불을 받고 잔돈을 안 줬다. 밖에 천둥이 쳤다. 뒤에 줄 서 있던 사람이 죽었다. 전화가 울렸다. 후후.. 설정을 많이 뿌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