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당사자성’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
노동소설 삼인칭의 서술자적 자아-박지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최근 박지영 소설의 일련의 행보는 이른바 ‘노동소설’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민음사, 2023)에 수록된 여러 편의 소설이 그렇거니와 『테레사의 오리무중』(자음과모음, 2024)에 묶인 세 편의 작품 역시 ‘노동’이라는 주제 의식을 전면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노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소설에서 삼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 삼인칭이 인물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느낀 감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까지를 해설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올드 레이디 버드」의 진술 형태를 들 수 있다. 이 소설은 박물관에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영우’가 학예사인 ‘정’과 친해지고자 하나 이른바 ‘정규직의 세계’에 그가 발들일 수 없는 절대적 기준이 있음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며 후반부에서는 다소 다른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특히 전반부에서 두드러지는 삼인칭 진술이다. 전반부에서 영우의 ‘비정규직으로서의 나’에 대한 진술은 다음과 같이 언어화된다.
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을 죽은 고양이는 영우에게 일깨워주었다. 자신은 불행하게 로드킬 당한 죽은 고양이 앞에서 죽은 새의 이야기를 하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떤 모함의 의지를 담아. 그러니 영우는 애초에 공평하지 못한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공평한 고양이가 있는 세계에 자유로운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공평한 일이었다. 공평한 세계는 그런 식으로 유지될 것이다. 영우 같은 사람을 출입 금지시키는 것으로. 그것이 영우가 느끼는 공평함의 정당성이었다. [강조-인용자]*
ⅱ
작별 인사가 여러 번 필요할 만큼 끝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서 영우는 더 완벽한 시그널을 기다렸지만 그런 완벽한 시그널이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도 아니었다. 제대로 시작한 적 없어서 끝낼 수도 없는 것, 영우의 진짜 삶은 늘 그 사이에 존재했다. [강조-인용자]**
ⅲ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핵심은 그것이었다. 아주 작은 차이가 만드는 고양이가 있는 세계의 안과 밖에 대해서, 애초에 확연히 다른 사람에게는 느끼지 못할 어떤 패배감과 의혹이 영우에게 주경을 선택하게 했다. [강조-인용자***
*박지영, 「올드 레이디 버드」, 『테레사의 오리무중』, 자음과모음, 2024, 101쪽.
**박지영, 위의 글, 111쪽.
***박지영, 위의 글, 115쪽.
소설의 1부에 해당하는 박물관 에피소드에서, 영우는 학예사 정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자신 역시 고양이를 좋아하는 ‘척’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이 우연히 박물관 정원의 길고양이를 차로 치는 모습을 목격한 영우는 그 현장의 목격자가 됨으로써 정과 사이가 틀어진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영우는 ⅰ, ⅱ와 같이 상황을 판단한다. 물론 영우의 캐릭터가 자기 객관화에 능하며 신속하고 정확하게 결론을 내리는 성격을 지녔을 수 있다. 그러나 그뿐일까? 영우의 상황과 내면을 표방하는 듯한 두 진술은, 영우의 내면 자체를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영우에 대한 태도를 내보이는 것 같다. 가령 ⅰ에서 영우가 느끼는 ‘공정함’이 계급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선에서 작동하는 기준이라는 점은, 영우에게 불편함이나 난처함으로 ‘느껴졌을’지는 몰라도 영우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즉각적으로 얻는 통찰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마찬가지로, 계약이 연장되지 않아 일을 그만두게 된 영우가 정과의 화해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좌절된 상황에 대해 ⅱ와 같이 진술하는 것은 어떠한가. “제대로 시작한 적 없어서 끝낼 수도 없는 것”은 영우의 성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 진술이 곧 인물의 성격인 것은 아니며, 인물이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미묘한 화자의 차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그 뒤에 이어지는, 그녀의 삶이 “그 사이에 존재했다”는 말로 하여금 시작과 끝에 대한 구절은 보다 서술자가 진술해 주는 객관적 판단처럼 읽힌다.
한편, 퇴사한 영우가 임시 보호하던 고양이 테루를 주경에게 입양 보내고는 그녀의 돌봄에 끊임없이 관심(의심)을 표명하는 서사의 후반부 내용을 고려하여 ⅲ의 인용에서 영우가 테루의 입양자로 주경을 선택한 까닭을 밝혀 주는 구절을 보라. 이는 영우가 종종 사람들로부터 패배감을 느꼈다는 ‘사실’ 이상의 해석이 가미된 진술이다. 실은 테루를 보고 싶어 해서 자신에게 그렇게 연락해 온 게 아니냐는 주경의 말에 뒤늦게 자신이 갈구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듯한 소설의 뒷이야기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영우가 스스로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 채 주경에게 특정한 행동을 요구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므로, 시간적으로 그보다 앞에 해당하는 위의 인용에서 영우 행동의 이유를 아는 자는 서술자적 자아뿐이다.
그런데 이렇듯 인물의 내면 이상의, 해석적 태도를 보여 주는 삼인칭 진술은 왜 쓰였는가? 이러한 진술의 형태가 서사적 규칙(서술자와 시점 문제)에 부합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넘어서 이러한 서술자적 개입이 필요한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인칭 진술이 ‘나’의 관점에서 세계를 재구성하고,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진술을 보편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정치성을 획득한다면, 삼인칭 진술은 그에 역전된다. 삼인칭 시점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표방함으로써 보편적 ‘나’의 개념으로 ‘인물의 개인성’을 확장한다. 그런데 위에서 예로 들었던 박지영 소설의 구절을 보면, 삼인칭 서술자는 어떤 면에서는 그 객관적 지위에서 스스로를 다소 내려놓는 듯 보인다. 명확하게 어떤 인물(또는 작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포 독자와 내포 작가를 포괄한 서사의 참여자 가운데 누군가의 관점을 통해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드러내는 것 같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이는 삼인칭 서술자가 인물에 대한 일련의 태도를 내비침으로써 인물과 흡사한 자아를 드러낸 셈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왜 그렇게 될 필요가 있었는가? 앞선 인용에서 서술자가 영우의 삶의 일부를 해설해 주는 구절의 내용을 다시금 상기해 보자. 서술자의 태도는 영우가 홀로 처해 있는 곤란한 상황이 그녀 자신에 의해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기울어진 공정에 근거하고 있다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진실을 드러낸다. 영우가 주경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모습이 “패배감과 의혹”의 동질감에 의한 것이란 점도 그렇다.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영우의 행위에 서술자의 간접적 주석이 달림으로써 영우의 입장은 조금 더 양해된다.
이는 일인칭을 통해 개인적 정치성의 보편적 확장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달리 말해 보편의 정의로운 전망 혹은 진리가 추구되기 어려운 현실의 상황 속 과감한 ‘객관적 진술’에의 시도다. 이때 ‘어려운 현실의 상황’이란 궁극적으로는 인물을 통해 혹은 인물을 진술함으로써 획득되는 ‘상정된 자아’에 개별적 자아를 의탁함으로써 공통의 ‘나’를 형성하고 그로써 총체적 전망을 획득하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발화로서 ‘자아’의 다발성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치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이 시점에 보편적 자아로서 삼인칭을 시도하는 것은, 삼인칭을 통해 ‘태도’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그 규칙을 다소 위반하는 것일지라도 오늘날 객관적 전망을 타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