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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은실 Aug 16. 2024

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6)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당사자성’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

outro. 삼인칭의 엄정함과 일인칭의 삼인칭화최은영과 문진영을 되살피며


최근 삼인칭 소설은 우리 시대의 현안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서술자적 자아를 전면화함으로써 총체적 전언을 시도하며, 또는 적극적으로 물러남으로써 그 숨긴 태도를 읽도록 요청한다. 이처럼 그 삼인칭 서술자의 활용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전지적’으로 상정된 서술자의 시점과 발화 및 그 존재를 빌려 지금 우리에게 엄정하게 다뤄져야 할 결핍의 지점들에 적극적인 대안을 만들어 내고 또 그러한 개별적-보편적 자아를 의탁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거듭 보내고 있다는 점을 읽어 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여성 서사에서의 삼인칭 및 일인칭의 삼인칭화에 대한 양상이다. 후속 작업에서 섬세하게 다룰 것을 기약하며 최은영과 문진영의 단편 소설과 삼인칭/일인칭의 작동 방식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해 두고자 한다.

앞서 공현진의 소설이 일종의 연대 가능성을 통해 지구적 차원의 돌봄을 서사의 폭넓은 주제 범위에서 다루는 것처럼, 최은영의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2023)은 여성의 허스토리(herstory)로서 여성 관점의 역사화의 작업에서 돌봄이라는 의제가 포괄적으로 사유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사위 제임스가 출장을 간 사이 작은딸 우경을 보러 홍콩에 간 기남은, 손자 마이클과 그 집의 헬퍼 제인과 인사를 나눈다. 기남이 딸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기남이 소환하는 자신의 여러 정체성이다. 기남은 자녀와의 만남을 통해 어머니로서의 자신을 성찰하는 동시에 자신을 버렸던 부모에 대한 기억을 중첩시키면서 여성 자녀로서 자기 삶을 회고한다. 한편 제인을 통해서는 아홉 살 때부터 식모살이를 했던 자신의 과거를 다시 떠올린다. 기남의 이러한 회고를 능숙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시점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삼인칭 서술자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소설에서 삼인칭 서술자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기남이 현재 자신과 관계 맺는 이들을 통해 자신의 역사를 회고함으로써 그것을 다시 쓰기 시작할 때, 그 모든 과거가 부끄러웠다는 그녀의 고백*은 마이클의 ‘부끄러워도 된다’는 말에 의해 용서받는 듯하다(“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이때의 삼인칭 서술자는 이 장면을 다만 보여 주고 있을 따름이지만, 바로 그 관점이 가진 객관적 지위를 고려해야만 한다. 우리는 기남의 자기 역사에 대한 재조명과 그로부터 찾아드는 부끄러운 감정이 더는 그녀만의 짐으로 남아선 안 되며 그것을 더욱 다정하게 보듬어야 한다는 엄정한 삼인칭 진술의 태도를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 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 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최은영,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2023, 318쪽)
**최은영, 위의 글, 319쪽.


이렇듯 더는 ‘개인적 관점’의 주관성에 대한 정치적 비평이 아닌, 삼인칭에 의한 공정한 시선 속에서 허스토리에 대해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는 진술과 비교할 때, 문진영의 「내 할머니의 모든 것」(『최소한의 최선』, 문학동네, 2023)은 그 비슷한 태도에 대한 다른 작법적 형식을 보여 준다. 이 소설은 손녀인 ‘나’의 일인칭으로 전개된다. 소설은 미혼인 삼촌의 죽음으로 인해 오래전 이혼 후 집을 떠난 삼촌과 엄마의 엄마, 즉 외할머니와 재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녀가 없는 삼촌이 사망하게 되어 그의 재산 상속의 1순위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녀와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선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문제는 소설의 주요 사건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외할머니의 삶이며, 이것이 엄마가 아닌 ‘나’의 발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데 있다. 이 소설이 ‘나’에 의해 할머니의 삶이 어떠했다고 진술되는 형태를 띤다는 사실에 미루어 볼 때, ‘나’는 엄마에게 전해 들은 (혹은 할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넌지시 짐작되는) 이야기들을 자기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말하는(telling) 형식을 취한다. 할머니와의 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 줄(showing) 수도 있으나 일인칭 화자가 다른 인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로 또 다른 인물의 삶을 성찰하는 형식은 지극히 그 진술의 주관성에 대한 해석을 요한다.

앞서 최은영의 소설에서 ‘여성 젠더의 역사’에 대한 ‘개인적 견해’로서의 주관적 진단이 아닌, 보다 완고한 이해를 도모하는 객관적 태도로서 삼인칭이 작동하고 있음을 짚었다. 그러한 엄정한 시각의 정치성을 이해할 때, 문진영의 소설에서는 어째서 손녀의 일인칭 시점을 통해 조모의 서사가 재기술되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 소설에서의 일인칭은 사실상 모녀, 조모 손녀의 관계를 모두 포괄하는 재진술의 형태를 띠며, 전달자 인물이 곧 삼인칭 서술자적인 방식의 거리를 확보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이때 일인칭 서술자가 손녀라는 점 즉 모계 혈통의 인물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모계 서사에서 세대 차이가 나는 각 여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과 직접적인 관계성을 가진 인물을 통해 그러나 그들 사이의 공백을 통해 관찰자적인 방식의 접근이 가능하며 또 필요함을 보여 준다. 이로써 모계 여성에 의한 여성 역사의 서술에서 한 세대를 건넌 관계 양태는 직계에 비해 객관적 관점을 획득할 수 있고, 또 그러한 거리감으로부터 ‘여성’이라는 동질성을 강조하는 대신, 다른 여성의 삶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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