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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은실 Aug 16. 2024

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5)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당사자성’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

돌봄 소설 삼인칭의 거리 두기-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를 중심으로


노동이라는 테마가 돌봄이라는 주제로 확장되고 있으며, 삼인칭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박지영의 소설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장례세일」 등에서 또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 소설들에서도 얼핏 서술자적 자아가 엿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노환 및 죽음을 상품화하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 교집합을 지니고 있는 두 소설에서 아들 인물은 표면적으로 자신이 아버지를 ‘팔아서’ 소소한 밑천을 마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서술자적 자아는 그들이 자식으로서 부친을 부양하는 과정에서 노동으로서 소모되는 인간성에 대한 힌트를 부분적으로 부여한다. 가령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에서 아들 강선동은 형제들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돌봄노동을 떠맡은 것에 대해 “자신과 남을 돌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착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착함은 양보가 아니었다. 희생이 아니었다. 투쟁하고 악착같이 싸우고 탐욕스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는 성찰이 뒤따른다. 이는 강선동의 생각이나 내면에 대한 노출처럼 보이지만, 그에 앞서 ‘착함’에 대한 가치 판단이자, ‘강선동의 착함’이 얼마간 그의 생존전략임을 이해하게끔 하도록 이끄는 가치 판단에 가깝다. 이러한 돌봄–노동소설에 대한 삼인칭 진술은 ‘세일즈하는 돌봄노동’이라는 결과가 돌봄 수행자에게 어떤 미덕의 정당성을 요구하느냐는 질문 및 그에 대한 태도를 내재한다.

*박지영,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이달의 이웃비』, 민음사, 2023, 59쪽.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노동’이라는 현안이 인물의 ‘돌봄’이라는 행위를 통해 재현됨으로써 서사에서 노동/돌봄 등과 같은 범주가 확장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삼인칭 서술자적 자아를 통해 현시점에 결핍되어 있는 ‘총체적 진리와 대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이 과감한 시도가 돌봄/노동이라는 결합된 주제를 재현하는 데 차용되고 있다면, 이는 실재하는 현실에서 돌봄과 노동 문제가 더는 분리가 불가능한 사안이며 그러한 사안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재현의 주제 및 재현의 서술 형태를 고려할 때, 노동/돌봄의 문제는 또 다른 전 지구적인 문제에 대한 주제로 확장될 수 있고 이때 사용되는 삼인칭의 또 다른 진술의 효과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소설에는 함께 수영을 배우는 희주, 주호라는 두 청년 인물이 등장해 기후 위기 시대에 각각 자신에게 ‘생존’ 내지는 ‘화를 낼 만큼 중요한 것’의 의미를 살핀다. 이때 기후 위기라는 전방위적 위기의 감각은 노동 현실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대에 자신과 타인을 헤아린다는 의미의 확장된 차원의 ‘돌봄’을 호출한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속에 직결되는 모두의 문제’라는, 기후 위기라는 현안에서 소급되는 ‘개별 인간의 존속 행위’다. 희주가 생존 문제를 직면하면서 떠올리는 것은 성과주의와 인간 소외에 대한 경험이다. 학창 시절 공부에만 매진했던 그녀는 수능이 끝난 직후 자살한 친구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이제는 친구뿐만 아니라 인간이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시점에, 그녀가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애정 어린 말은 이런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잘하면 30년 뒤에.”**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소설보다 여름』, 문학과지성사, 2023, 33쪽.

한편 주호가 기후 위기를 통해 떠올리는 문제는 노동과 관련한 것이다. 유능한 직원이었던 주호는 작업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 ‘카샤’를 떠올린다. “안전을 지키면 그만큼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공장의 관계자들은 안전수칙과 관련한 것들을 묵인했다. 카샤가 죽은 뒤에도 멈추지 않는 공장에 주호는 “이건 아니죠.”**** 한 마디를 던짐과 동시에 권고사직에 가까운 처분을 받는다.

***공현진, 위의 글, 20쪽.
****공현진, 위의 글, 21쪽.


이러한 두 사람의 사례는 노동, 성과주의, 인간 소외와 같은 문제가 더는 분리된 차원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지점에서 한데 엮여 있음을 드러낸다. 각기 다른 계급, 자본, 젠더를 지닌 이들이 저마다 개별적으로 겪어 나가는 위기를 공통적으로 상정된 문제인 ‘기후 위기와 생존’ 문제에 투영해 볼 수 있게 된 현실이 돌출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사람이 수영 강습생으로 만나 서로 마지막 순번을 도맡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타인의 분노를 통해 모종의 연대라는 해결책 또한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영 강사는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 두 사람, 특히 눈치가 없는 주호에게 분노를 쏟아 내기에 이른다. 배움이 늦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주호는 그에게 다가가 “선생님, 괜찮으세요?”***** 하고 묻는다.

*****공현진, 위의 글, 36쪽.


만약 이 장면으로 하여금 이 소설이 ‘공통의 의제’ 아래 개인적 문제를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하고 나아가 그들이 저마다 다르게 이해하는 개별적 공통의 의제를 공동의 협력으로 보듬어 나갈 수 있음을 지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이러한 ‘장면’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삼인칭 서술자는 수영 강사의 태도에 대해 변명의 여지를 줄 수도, 그의 내면을 보여 줄 ‘지위’를 가지고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수영 강사가 나름대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과정에서 주호에게 화를 냈으며 계약직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다른 인물의 입을 통해 전달됨으로써 그에게도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단서를 남기는 데 그친다. 요점은, 이 소설의 경우 삼인칭 서술자의 자아가 박지영 소설에 비하면 완전히 뒤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사가 말하지 않은 것 또는 돌출하지 않은 자아라는 요소는, 그것이 ‘물러나 있음’에 주목할 때 역으로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자아’로 재독될 수도 있다. 즉 삼인칭 서술자의 태도 측면에서 접근할 때, 우리는 서사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을 읽어 낼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객관성을 띠고 인물 및 세계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내릴 수도 있는 삼인칭 서술자가 삼인칭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소설의 삼인칭 서술은 철저히 인물을 중개하는 객관적 시선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물을 ‘통해’ 서술자의 태도를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서술자는 인물의 내면과 생각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전말을 진술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서술자가 제시하는 정보에 독자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이입할 때 그 추적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입’이라는 장치를 고려한다면 이 소설의 서술자가 인물을 ‘통해’ 어떠한 사실들을 전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다른 인물 또는 어떠한 장면을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이입하고 고백하고 재구성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주호도 꿀벌 실종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 꿀벌 무리와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체인처럼 고리로 연결되어 있고, 그 고리 끝에 자신이 매달려 있다. 나는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주호는 무슨 일이든 거기에 자신이 얼마나 엮여 있을지 생각해보게 됐다. 어느새 습관이 됐는데 자기가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죄책감을 느끼기 위함인지 죄책감을 덜기 위함인지 헷갈렸다. 한편으론 그 헷갈림 속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    


희주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환경 문제에 집착하게 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처음 시작이 어떻든, 또 현재의 강박이 어떻든 환경에 관심을 갖는 일은 희주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줬다. (...) 희주는 화내야 하는 일과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을 정했다. 고래와 펭귄이 죽고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지구가 죽어가는 일에 화를 내자. 어차피 인간은 죽는 건데. 다 같이. 희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    


******공현진, 위의 글, 18~19쪽.
*******공현진, 위의 글, 32~33쪽.


인물들은 기후 위기와 관련한 기사 또는 다큐멘터리를 본다. 가령 꿀벌이 실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해수면이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도가 그렇다. ‘그것을 보았다’라는 사실에 대한 진술은 객관적이다. 서술자는 그것을 보는 인물에 대해 추가적인 정보를 주지는 않는다. 이를 보여 주듯 위의 두 진술에서 주호와 희주는 각각 자기가 어떤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되 그 의미를 알지 못 한다(“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환경 문제에 집착하게 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이러한 ‘모름’의 상태는 서술자가 인물의 앎과 깨달음에 대해 서술자적 자아를 통해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서 살펴보면 서술자가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가치를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서술자는 인물이 벌, 고래 등을 봄으로써 어떤 상태에 대한 자각을 촉구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어떤 대상물을 대하는 인물의 모습이 서술자에 의해 중개됨에 따라 그것을 그들이 어떻게 다뤄 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특정 관점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를 이해한다면, 생존을 위해 수영을 배운 두 사람이 수영을 통해 모두의 죽음과 자신의 생존 앞에서의 연대 가능성을 넌지시 성찰하는 행위가 바로 이러한 삼인칭 서술자가 부여하는 객관적 거리감과, 그것을 채우는 인물의 개별적 관점에 의해 가능해짐을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업무 실적에 대한 압박에 의해 그랬을지도 ‘모를’ 수영 강사에게 화내는 대신 ‘괜찮냐’고 물음으로써 ‘모르는 채’ 자기 경험을 개입시켜 그를 위로하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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