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당사자성’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
‘그’가 말하기를-삼인칭 서술자의 약진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최근 서사에서 이야기 전달자로서 삼인칭 서술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정주아의 논의에서 충분히 이야기된 것처럼, 비교적 근래의 문학에서 두드러지는 형태는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이었다. ‘~해도 괜찮아’류의 에세이가 부쩍 쏟아져 나왔던 2010~2020년대의 현상에서 두드러지는 일인칭 시점의 약진을 정주아는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해석되고 제한되는 특징을 삶의 태도로 기꺼이 수용하려는 추세”*로 본다. 정주아의 이러한 논의를 참고하면 일인칭의 약진은 총체적인 차원에서 문학이 진리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믿음이 더는 불가능해진 시대상을 징후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소설적 ‘나’를 에둘러 보다 큰 차원의 공동체적 믿음을 갈구하고 실현하고 그 실천의 가능성을 갈구해 내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다면, 저마다의 ‘나’의 “시계(視界)”**를 통해 역사를 재조립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주아,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56쪽.
**정주아, 위의 글, 60쪽.
그러나 ‘나’를 활용한 일인칭 시점의 소설은 그러한 시대 상황에 대한 정당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작가의 구속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서 정주아는 재현의 장르로서 소설의 성격을 되짚는다. 즉 ‘괜찮지 않은 현실’과 ‘괜찮다’고 말하는 소설적 ‘나’의 대립이 곧 소설이라는 양식과 작가 의지가 대립하는 것이라 볼 때, 이때의 ‘나’(작가의 의지와 소설적 양식의 의무가 결합된 존재인)를 통해 그 재현의 윤리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 “글과 작가의 동일시 현상이란 어찌 보면 소설 본래의 허구적 성격과 멀어지는 대신에 생겨나는 일인칭 글쓰기 특유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힘이 수많은 ‘나’들을 정치적 주체로서 발언하게 만들고, 오늘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연대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보다 좀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변화는 따로 있는 듯하다. 바로 소설의 창작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대상의 재현과 상대화 단계에 대한 반성이다.”(정주아, 위의 글, 67쪽)
일인칭의 약진 현상과 그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작가/인물 간 일치에의 요구 및 그에 따른 재현의 정치성과 속박에 대한 이러한 정주아의 논의를 되짚을 때, 최근의 소설들은 시점의 전환을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강구하고 있는 듯하다. 앞서 나는 최근 소설에서 삼인칭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삼인칭 자체가 새로운 서사적 시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노동, 환경, 젠더 이슈와 같이 현실의 주요 사안들을 다룸에 있어서 삼인칭 서술자의 ‘발화 방식’ 자체는 특이점을 지닌다. 이에 최근 소설을 중심으로 삼인칭 발화의 형식 전환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