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 학교와 가르침에 대한 유머러스하고도 따스한 이야기.
※ 스포일러 있음.
※ 아래 이미지들의 출처는 왓챠피디아.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바튼 아카데미>는 차가운 눈밭 속 따뜻한 불씨 같은 작품입니다. 크리스마스에도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학교를 떠날 수 없는 이들의 애환을 생생히 보여주는 이 탁월한 영화는,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을 넉넉히 선사합니다.
주인공 중 한 명인 허넘은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괴팍하고도 고집 센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교사와 학생을 포함하여 한 명도 없어 보이고요.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하는 연휴에도 남겨진 학생들을 돌봐야 할 처지에 놓인 것도, 그의 서툰 처세 때문일 테죠.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인 털리 역시 외로운 인물입니다. 명석하지만 까칠한 이 소년은 항상 날이 서 있기에, 친하게 지내는 급우들이 몇 명 없습니다. 다만 가족에 대한 아픔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어쩐지 감싸주고 싶어지는 아이이기도 합니다.
학교의 식당을 책임지는 메리는 상당히 멋진 캐릭터입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고통 속에서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견뎌나가는 단단한 인간이지만, 종종 상실의 아픔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깁니다. 그리고 이를 보는 우리의 한 구석은, 몇 번씩이고 무척이나 아파옵니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기묘한 조합이 처음부터 즐거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을 놀리다 어깨가 빠져버린 털리가 엉엉 울던 것을, 다들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솔직히 그들의 불편한 동거가 훨씬 더 엉망이 되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다 두 남자가 술집에서 리디아와 조우하고, 그녀의 초대를 받아 세 명이 파티에 참석한 순간부터 영화는 몹시 흥미로워집니다.
리디아를 짝사랑하는 허넘은, 그녀가 파티 도중 자신에게 건네는 호의 하나하나에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그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바로 그렇기에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입 맞추는 순간 클로즈업되는 그의 비참한 표정을 보며, 관객은 허넘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어 지지요.
아무튼 마음이 괴로워진 선생은 학생에게 불필요한 말실수를 하고, 곧 이에 대한 미안함을 느껴 다음 날 털리와 메리에게 준비한 선물을 건넵니다. 어느덧 갈등은 해소되고, 셋은 흐뭇하고도 화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털리의 간절한 소원인 보스턴으로의 일탈을 끝내 진행시킵니다.
여정 가운데 메리는 오랜만에 여동생을 만나러 가고, 남자 두 명은 스케이트장에서 유쾌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 허넘은 교수가 된 하버드 동창과 마주치는데, 자칫 난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스승과 제자는 임기응변을 통해 그를 잘 속여 넘깁니다. 알고 보니, 허넘은 대학 시절 자신을 억울한 처지에 빠뜨린 금수저 룸메이트를 차로 치어 퇴학을 당한 것이었죠. 참으로 그 다운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어 극장에서 헛웃음이 나왔네요.
그나저나 털리가 간직한 비밀은, 그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가 그토록 보스턴에 오고 싶어 했던 이유는 바로 정신병원에 있는 자신의 아빠를 보기 위함이었죠.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상대에게 자신의 학교생활을 읊는 소년의 얼굴은, 보는 이의 눈시울을 붉게 만듭니다. 이는 유독 가족이라는 단어에 예민해졌던 털리의 모습이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시간이 지나 다시 학교로 귀환한 셋은, 정겨우면서도 행복하게 새해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정신병원에서 문제를 일으킨 털리의 아빠로 인해 그의 엄마와 새아빠가 바튼 아카데미를 찾아오고, 소년은 원치 않는 전학을 겪을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리고 스승 허넘은, 제자를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합니다. 털리가 얼마나 사관학교로의 전학을 두려워하는지를 알기에, 본인이 대신 바튼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죠. 허넘 자신도 몰랐을 그의 숭고하고도 용감한 면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우리의 마음은 몹시 뭉클해집니다.
사실 그가 학교를 떠난 후 가혹한 세상 속에서 정착한 곳이 마땅치 않기에 앞날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평생을 추억할 아름다운 관계를 깊숙이 간직하게 된 점은 제게 큰 위로가 됩니다. 터넘의 소논문 공책이 빽빽이 완성될 그날을 절절히 소망하기도 하고요.
서로 엇갈려 함께 있지는 못하되 눈밭에 공평하게 버려진 한 짝의 장갑처럼, 체리와 알코올과 아이스크림이 한데 섞인 채 활활 타오르던 디저트처럼, 모두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인연이 하나쯤 있을 것입니다. 약물 이외에 우울에 잠긴 인간을 수렁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건 오직 타인의 관심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바튼 아카데미>를 아직 안 보셨다면, 옛 시절의 소중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 작품을 오늘 밤 감상하시는 건 어떨까요?
2025. 0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