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악어엄마 Oct 20. 2024

잉글리시의 늪

영어 못합니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이 하나둘 놀이터로 모인다. 이미 편의점의 동선을 완벽하게 파악한 아들이 물이 마시고 싶다고 조른다 (라고 쓰고 "엄마 젤리 사줘"라고 읽습니다). 남편은 처음에는 쭈뼛거리더니, 어느새 동네 꼬마들의 "노예"가 되어 시소를 타고 있다. 유치원생들이 외친다.


"패스터! 패스터!"

"모어! 모어!"


한국 아이들은 거침없이 독일 아저씨에게 영어로 주문을 넣는다. 그중 영어 유치원 교복을 입은 애들도 있는데, 아이들은 독일 아저씨가 진짜 좋은가 보다. 시시콜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영어로) 우리 엄마는요. 화가 나면 진짜 소리가 커서 시끄러워요."

"(또 영어로) 우리 아빠는요. 맨날 야근한데요."


놀이터의 다른 어른들은 눈길도 주지 않던 아이들이 유독 남편에게만 수다를 떤다. 영어 유치원 가방을 들고 이 모든 모습을 바라보던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집에 가자고 하자, 아이는 아저씨를 꽉 껴안고 "아이 러브 유!"를 외쳤다. 남편은 넋이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꼬맹이들에게 초콜릿까지 받았다. 신기할 따름이다.



영어교육이 한국 육아에서 엄청 중요하긴 한가 보다. 등교시간이 되면 우리가 다니는 국립 유치원 바로 붙어 있는 영어 유치원으로 출근하는 듯한 외국인들을 매일 만났다. 같이 놀이터에서 만나는 엄마는 내가 한국에 있던 3개월 동안 영어 학원을 3번을 옮겼다. 주차가 불편해서. 아이가 재미없다고 해서. 교재가 부실해서. 미국 사람이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과외를 하고 있다는 것도 그 엄마를 통해서 들었다 (근데 문법 선생님은 한국 사람이란 것도).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는 영어 학원 버스들을 보며 동네에서 유명한 어학원들이 어딘지도 알게 되었다. 


영어 유치원을 다니는 앞집 손녀는 내 아들보다 한 살이 어린데 이미 영어로 읽고 쓴다고 했다. 새롭게 알게 된 엄마들의 카톡 프로필에는 아이들의 영어 연극 비디오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러니 외국에서 온 우리 아들이 영어 까막눈이라고 했을 때 반응들이 참 재미있었다. 


독일에서 왔으니 영어를 쓸 거라고 예상했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보통 이런 식이었다. 


"어, 우리 친척이 독일에서 주재원 하는데 학교에서 영어 쓴다는 데요?"


아니라고 하면 의아하단 표정이었다. 외국 사람들은 영어 쓰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그것도 젊은)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것이 꽤 놀라웠다. 


어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일부러 내 아들에게 가서 영어로 말을 걸으라고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 내가 "얘 영어 하나도 못해요!"라고 김을 빼 버렸다. 진짜다. 아직 만 5살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질 않아서 영어로 숫자 세기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 




뭐 대단한 교육관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육아를 장난처럼 생각하니까 아이가 클 때까지 '비밀 언어'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지 않고, 부부싸움이나 아이가 안 들었으면 하는 얘기는 영어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일에서는 아이들에게 조기 영어 교육을 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독일도 물론 영어로 수업하는 이중언어 유치원이 있다. 사립이 대부분이고 비싸다고 들었다 (관심이 없어서 얼만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이의 유치원 친구 중에 지금 영어 할 줄 아는 애는 딱 하나다. 나이지리아 출신 부모님을 둔 조슈아는 독일어가 아직도 서툴러서 선생님 앞에서도 영어로 이야기한다. 근데 내가 항상 주장하지만 유럽에서 영어 못하면 진짜 공부를 안 했거나 머리가 안 좋은 것이다. 특히 그리스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을 영어식으로 발음만 해도 영국 사람들이 경이롭게 반응하는 걸 보고(고급 영단어는 그리스어에서 많이 오니까), 웃겼던 기억이 있다. 


영어 공부 꿀팁 방출


남편은 영어를 꽤 잘하는데, 방법은 간단하다. 고등학교 때 자기가 좋아하는 드라마와 노래 대사와 가사를 줄줄 외울 때까지 반복한 거다. 그중 하나는 로완 앳킨슨이 주연한 블랙 애더 (Black Adder) 였다. 옥스퍼드와 캠프리지 출신 코미디 배우들이 나와서, 영국 영어를 역사와 함께 배울 수 있는 드라마다. 진짜 유명한 영국 배우들의 리즈 시절을 감상할 수 있다. 또 미국의 전설적인 펑크 밴드 배드 릴리전(Bad Religion)의 가사도 외운다. TOEFL 말고 GRE (대학원 입학시험) 수준의 고급 어휘들로 가득 차 있다. obfuscate, tenuous, capricious, atavistic 같은 단어들이 노래에 나오니, 외워 부르면 유학 가서도 절대 꿀리지 않을 거다.



영어시험 만점 받은 남자가 듣는 노래

이런 방법으로 영어 정복에 성공한 사람 옆에서 20년을 같이 산 나는 설거지 하면서 영어로 된 팟캐스트를 들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내가 영어를 하면 네이티브가 아니라고 다들 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된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는 세계가 많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영어 말고도 다른 다양한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현할 수 있으면 봉준호가 되고 한강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독일에서는 우리 아이가 이중 언어자라는 것은 명함도 내지 못한다. 내 아이 주위에는 독일어 외의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얀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리나는 아랍어를, 톰은 폴란드어를 한다. 유수프는 벌써 4개 국어를 한다. 아랍어, 독일어, 러시아어, 체첸어를 구사한다.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고, 그냥 다들 그렇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별 노력도 없이 되는 걸 보니 외국어라는 걸 우리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가 필요 하면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두 나라에서 자라는 나의 아이, 언어의 풍부함을 알았으면 좋겠다. 한자어에서 파생된 어휘들이나, 모음과 자음이 어떻게 어울려 단어의 뜻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 이런 상징과 소리의 조합이 만드는 한국어 특유의 감정과 이미지 같은 거 말이다. 여러 언어의 매력과 이상한 점들을 모두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기 아빠처럼 돈 안 쓰고 책 한 번 안 보고 놀면서 배웠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어는 아직은 안 가르칠 생각이다. 나중에 학교에서 배우겠지 뭐. 


(대문 사진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ilka_Alpine_Milk_Chocolate_bar_100g_with_chunks_broken_off.jpg)              



이전 07화 금쪽같은 외동아들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