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모일 수 있을까
작년에 갑자기 늦바람이 났다. '베를린 병'에 걸렸다. 유럽 내에서 다양성으로 따지면 베를린을 따라갈 도시가 없다. 그 후 우리 아이는 벌써 나와 함께 세 번이나 베를린에 다녀왔다. 이 글을 쓰기 한 달 전, 또다시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침 일찍 열차를 타야 해서 새벽에 일어나 일정을 확인했다. 그런데 경로를 확인하던 중 빨간색 삼각형 경고 메시지가 떴다.
우리가 가는 길 위에 있는 졸링겐에서 테러로 세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뉴스를 찾아봤지만 용의자를 쫓고 있다는 짧은 보도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설마 우리가 가는 길에 그 용의자가 나타나겠어?'라고 생각하며 짐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남편은 한숨을 쉬는 나를 보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지금 크리스마스 아니잖아.”
남편이 언급한 것은 2016년 베를린 한복판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이었다. 그때 대형 트럭이 마켓으로 돌진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부상당했다.
졸링겐 테러 용의자는 곧 시리아 출신 난민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TV에서는 독일 내 난민 지위 조차 받지 못했던 이 남자가 계속 독일에 남아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이어졌다. 메르켈 총리가 2015년에 한 유명한 발언, "Wir schaffen das" (우리가 해낼 수 있다)와 함께 국경을 난민들에게 열었던 장면들이 반복 재생되었다. 당시 많은 독일인들은 난민들을 환영하며, 독일은 부자 나라이고 받아들일 자리가 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유럽이 난민 사태로 난리가 났던 그 해, 아직도 기억나는 인터뷰가 있다. 나이가 지긋한 터키 할아버지가 리포터를 보며 말했다.
"독일이 이러면 안 돼. 이렇게 다 받아 주면 나쁜 사람들도 다 넘어온단 말이야."
그로부터 거의 9년이 흘렀고, 지금 독일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국경 검문을 다시 실시하고, 극우 정당이 동독 지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얼마 전에는 아주 많은 수의 난민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보도도 있었다. 당연히 불법이지만, 아프간 여행을 전문으로 알선하는 업체들까지 생겼다고 한다. 독일 정부는 이런 사례들을 일일이 확인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듯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dhrdDsmHkGA&ab_channel=WELTNachrichtensender
올해 한국 휴가에서 남편은 코로나 시절보다 더 동네에 늘어난 외국인들을 보면서 한국말로 농담을 했다.
"한국에는 못생긴 외국인이 너무 많아요."
나는 남편의 향상된 한국어 실력에 한 번 놀라고, 실제로 많은 외국 가족들이 동네에 늘어난 것을 보며 다시 놀랐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도 외국 아이들이 늘 있었다. 한국에서 만난 "외국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가 한국 사람이었다. 부모들은 다들 직장이 있고 고등 교육을 받은 번듯한 사람들이었다. 내 아이의 유치원에서 만난 한 아빠는 미국 대학 시절 주위에서 제일 예뻤던 중국 유학생을 꼬시는 데 성공했단다. 그 가족은 아이를 픽업할 때면 중국어와 영어로 아이와 대화했다. 다른 가족은 엄마가 서양 외국인인 경우였는데, 동네에서의 그 엄마의 인기는 거의 인플루엔서 수준이었다. 다들 자리를 잘 잡았고, 풍요로워 보였다. 외국인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문화 충돌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이 균일함이 유지되는 것 같았다.
내 고등학교 친구에게 말했다.
"남편이 한국에 살고 싶다고 난리야. 여긴 사람들이 다들 비슷해서 갈등이 없는 거 같대. "
"응. 근데 거기는 다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있으니까 더하지. 아파트 청약하면서 다 한 번씩 걸러 놓은 거잖아. "
독일에 있는 우리 아파트에는 12 가구가 살고 있는데, 그중 7 가구가 독일인 가족이다. 이 집을 소개한 부동산 직원이 그것을 강조하길래 좀 의아했다. 대도시에서 외국인이 없는 동네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 아파트의 장점은 이웃끼리 인사를 나누고 교류한다는 것이다. 맨 아래층에 40년째 사는 고인 물 독일 가족이 우리가 이사를 오자마자 바비큐 파티에 초대했다. 독일 아저씨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윗집 이웃의 흉을 보았다. 우리 아파트는 침실이 1개, 2개, 3개인 집이 섞여 있다 (그리고 독일 저소득층은 소위 WBS, 임대주택자격 증명서가 있으면 같은 아파트라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침실이 하나인 집에 사는 무슬림 가족이 애가 세 명이라는 것이다.
아파트 유일한 무슬림 가족은 이웃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히잡을 쓴 엄마는 매우 어려 보였고,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감옥에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2년 전 한국에 갔다가 돌아오니, 그 가족에게 변화가 생겼다. 남편이 돌아왔고, 젊은 엄마는 아주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1년이 더 지나자 그 집에 다섯째 아이가 태어났다. 이번에 한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열 살도 안되는 여자아이들이 히잡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아파트의 무슬림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중 9살 된 와헬은 우리 집에 오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예전에 동네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줬을 때 와헬도 쭈뼛거리며 따라왔고, 그날 아들이 친구들을 자기 방에 데려가 헬로카봇을 자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다음 날, 와헬은 아들이 유치원에 간 동안 집 열쇠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책가방을 들고 우리 집에 다시 찾아왔다. 내가 들어오라고 하기 전에 이미 신발을 벗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와헬은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20분쯤 지나자 여동생들이 오빠를 찾으러 우리 집에 왔다.
와헬은 이제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찾아온다. 그리고 나는 그 녀석을 위해 무슬림이 먹지 못하는 "젤라틴"이 없는 비건 젤리를 준비해 놓는다. 어제는 한쪽 눈에 멍이 커다랗게 들었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넘어졌다고 했다. 어떻게 넘어지면 눈에 멍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우선 잘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와헬의 부모는 자신들의 아들이 우리 집에 몇 달이 넘게 놀러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말을 걸거나, 간식을 보낸 적이 없다.
올여름, 테러 경보를 뒤로하고 방문한 베를린에서 나는 유대교 회당 앞 무장 경찰들을 보았다. TV에는 하마스와 헤즈볼라 관련 뉴스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급식에서는 돼지고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늘 방문한 카페 메뉴판에는 딸기 라즈베리 케이크 옆에 '젤라틴 함유'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포용은 쌍방이 아닌 듯 하다. 일방통행식 다양성이 얼마나 언제까지 계속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졸링겐 테러범이 살인을 저질렀던 그 지역 축제는 문화의 '다양성'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사람사는 건 다 똑같다고 말해왔다. 다양성이란 가치가 나와 나의 아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코로나 시절 동양사람들이 겪었던 수모와 차별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는다. 요즘은 정말 나도 잘 모르겠다.
(사진 : 아들이 모두 베를린에서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