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노올자
난 어렸을 때 서울의 복도식 아파트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성장은 이 아파트 구조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아파트에는 방이 세 개 있었는데 작은 방 둘은 복도에 나와 있고 안방이 베란다 쪽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 동은 한 층에 총 9 가구가 살았는데, 밖에서 놀 친구가 필요하면 복도로 가서 친구의 창문을 두드리면 되었다. 학창 시절 내내 또래 친구들이 주위에 바글바글했다. 평생을 가는 인연들이 여기에서 생겼다. 이런 아파트 구조 덕분에 우리 집에서 아직도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동생은 집에서 혼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엄마는 잠깐 집 앞 시장에 가신 동안 하교한 내가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동생이 잠에서 깨지 앉았다. 화장실이 급했던 나는 아래 집에 살던 동생 친구에게 부탁했다. 동생 친구는 우리 집 창문에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크게 외쳤다.
"친구야! 노올자!"
놀랍게도 동생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었다.
연고 없는 서울에서 엄마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신기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당시에 우리 남매들은 엄마랑 같이 놀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거 같다. 집에 돌아오면 약속 같은 거 안 해도 같이 놀 아이들이 옆에 있었다. 심심할 겨를이 없으니 엄마랑 놀 필요가 없었다. 형제가 다들 있었기에 몇 집 애들만 모여도 숫자가 대단했다. 아이들은 앞에 주차장에서 핸드브레이크를 푼 자동차들을 옮겨 가면서 놀 자리를 만들었다. 피구나 고무줄을 하고 비가 오면 공기놀이를 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부모님들이 아파트 인터폰으로 연락하면, 친구 부모님들도 복도에 나와서 밖에서 놀고 있던 우리한테 밥 먹으러 들어가라고 큰 소리로 전하곤 했다. 응답하라 1988 쌍문동 골목의 아파트 버전이다.
그리고 2024년 봄, 나는 놀이터에 있었다. 복도에서 뛰어놀다 경비아저씨에게 혼나던 엄마는 30년 뒤, 독일 아저씨랑 같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아이는 미끄럼틀 안에 들어가서 보이질 않는다. 뭔가 이상하고 과한 거 같았다. 애 하나 본다고 둘이나 나와있다니. 게다가 친정 엄마가 아이가 좋아하는 멸치 주먹밥을 가지고 놀이터로 나오셨다. 친정 엄마는 손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에게 말했다.
"애, 이것 좀 먹여라."
이제 1대 3이다. 나라도 빠져야지 이거 안 되겠다 싶다. 핑계를 대고 나의 아이에게서 스스로 멀리 떨어졌다. 아이는 지금 우리를 찾지 않는다. 처음 만난 친구와 아주 재밌게 잘 놀고 있다.
그러다 벌써 7시, 독일에서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시간이다. 학원에서 돌아온 한국 아이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놀 시간이다. 내 아들은 조금만 더를 외친다. 아들의 새 친구는 동갑이란다. 그리고 무려 로봇을 좋아한다. 그것도 헬로 카봇을! 사정을 듣고 나니 아이에게 빨리 들어가자고 할 수가 없다. 그동안 독일에서 아무리 헬로카봇이라고 고쳐줘도 독일 친구들은 아들의 장난감을 "트랜스포머?"라고 불렀다. 드디어 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쫑알쫑알 둘은 할 말이 많다. 벌써 8시가 다 되어 간다. 이제 들어가자고 소리를 지른다. 아이의 엄마도 들어가자고 한다. 어, 그런데 가는 방향이 같다.
"어? 너도 8 동살아?"
"응. 나도. 넌 몇 층 살아?"
"난 7층. 넌?"
"난 25층!"
3개월 뒤, 나는 아이의 친구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친구 한 명은 다른 친구와 다른 형제자매들을 불러왔다. 애들이 밥도 안 먹고 놀길래 어느새 돌아가면서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밥을 해다 먹였다. 날씨가 좋을 땐 단지 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에게 만두도 먹이고, 수박도 먹였다. 친정어머니는 열심히 치킨 너겟을 튀겨 날랐다. 사은품으로 받은 작은 케첩 한병을 아이들이 하루 저녁만에 다 먹었다.
어느새 나와 아들의 친구 엄마들은 동네에서 "그 무리"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내가 "그 무리"인 줄 모르던 엄마가 엘리베이터에서 통화하는 걸 들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독일에서 온" 우리 아들의 출국 시기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거에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친정집의 초인종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울 집 꼬맹이의 친구들이었다. 아이들은 키가 너무 작아서 홈패드 스크린을 확인하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서로의 초인종을 누르고, 놀자고 소리치고,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우선 밖에서 논 다음에 다른 집에 가서 더 놀기도 했다. 부모님이 집을 서재로 꾸며서 컴퓨터 모니터로 만화영화를 보았다는 아이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삶은 옥수수와 군고구마를 먹으며 친정집 티비로 헬로카봇을 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뿔뿔이 흝어졌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자기 집에 와 있을 때 인증샷을 찍어 보내주었다. 아빠들이 서로의 초인종을 누르고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독일로 돌아온 지금, 이제는 여기 아이들이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다. 옆 동 사는 레온과 이브라힘이다. 이브라힘 누나 율리아도 놀러 왔다. 얀까지 놀러 오면 이 녀석의 사촌들도 한 명씩 우리 집에 들어오기 때문에 정말 집에서 쿵쾅쿵쾅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은 온갖 장난감을 다 꺼내 놓고 놀고 있다. 여자애들은 엉터리로 피아노를 친다. 유수프는 남편이 아끼는 베이스 기타를 내려 달라고 애원한다. 남편은 너무 시끄럽다고 혀를 끌끌 찬다. 하지만 남편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이 애들이 집에 들락날락 하는 만큼 부모들은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이젠 밖에 나가서 애를 지켜보며 하품을 필요도 없다. 아이들은 서로의 집과 동네를 다니며 탐험하고 성장한다. 어떻게 해야 재미있게 오래 같이 놀 수 있는지 배운다.
한국과 독일에서 다시 만난 아파트는 그때와는 달랐지만, 비슷하게 정겨웠다. 부모가 플레이데이트 시간을 몇 주 전 부터 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전히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며 놀자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