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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Jun 24. 2024

사람이 인사를 해야지

인사를 잘하자

독일 유치원은 보호자가 애를 데리고 복도까지 들어가 등하원 시킨다. 아이가 옷을 다 걸 때까지,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기다리고 교실에 들어갈 때 아이에게 인사하면 등원이 끝난다. 하원 역시 선생님에게 아이가 "츄스"를 외치면 마무리된다. 그런데 나에게 독일 유치원에서 인사하기는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선생님들이 워낙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데다가 한꺼번에 보호자 들과 소리 지르는 아이들이 엉켜서 복도에 들어와 있으니 인사를 하기도 받기에도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특히 몇몇 선생님들은 인사를 씹기로 유명했다. 


맨 처음에는 나한테만 그러는 줄 알고 분개했다가, 같은 반 보호자들이 나중에 똑같은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이 동네 특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마 국룰 같은 게 있었다면 보호자들끼리는 인사를 했다. 꼭 같은 반이 아니더라도 할로, 구텐 모르겐, 구텐탁, 츄스 정도는 하고 지나쳤다.  




코로나가 끝난 한국 유치원에서 첫 하원하는 날이었다. 예전 어린이집은 노란 버스에서 집까지 데려다주었지만, 국공립 유치원을 다니는 이상 등하원은 보호자의 몫이 되었다. 이제 만 5살이 되어서인지 적응 기간 같은 것은 없었고, 아이는 남들처럼 오후 2시에 나와야 했다. 중간에 들어온 "전학생"은 잘 지내고 있을지 남편은 긴장하는 눈치였다. 


유치원에 도착하니 엄마들이 정문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자꾸 우리가 너무 늦게 왔다며 나에게 불평을 했다. 우리는 2시 정각에 잘 도착했으나 독일식으로 약속보다 15분 일찍 왔어야 했단다. 남편에게 좀 가만히 있으라고 눈치를 줬다. 갑자기 덩치 큰 외국인 남자가 유치원 하원을 기다리는 엄마들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게도 했다. 


우리는 쭈뼛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다른 엄마들에게 가벼운 목례와 함께 "안녕하세요"를 외쳤는데 민망하게도 대답이 없었다. 




다음날 유치원 가는 길, 아이는 자기와 같이 로봇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빨리 놀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독일 아빠는 우리가 또 늦게 간다고 불평하고 (등원 시간 20분 더 남았음), 여유만만 한국 엄마는 공원 한가운데 있는 유치원의 봄기운을 즐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들이 다니는 국공립 유치원 바로 옆에는 이 동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어 "아카데미"(일명 영어 유치원) 들이 몰려 있었다. 등원을 시키려면 아침마다 거기를 지나쳐야 했는데 학원 입구 앞에는 한국 선생님들이 빨간 카펫 위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영어학원을 지나갈 때마다, 외제차가 학원 앞에 섰다. 선생님들이 차 앞으로 종종걸음으로 몰려들어, 앞에서 이열 종대를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학원 유니폼을 입은 아이가 뒷문에서 내리자 선생님들이 어메리컨 스따일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헬로, 제이크!" "굿모닝, 제이크!"


하지만 아이의 보호자들은 선생님들에게 "헬로"를 날려주지 않았다. 아이는 10개도 넘는 선생님들의 손을 잡고 말없이 학원을 들어갔다.




한국 유치원 역시 아침이 되면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계신다. 텐션 높은 원장 선생님이 나와서 아이들에게 "사랑합니다." 하면서 하이파이브를 날리면 대부분은 모기 같은 소리로 아이들이 아침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돌려세워 보호자들에게 "안녕히 다녀오겠습니다." 배꼽인사를 시켰다.  그리고, 아이가 배꼽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본 남편은 눈이 동그래져 분개했다. 


"왜 아이들한테 배꼽인사를 시키는 거야? 그건 너무 비굴하잖아! 난 내 아이의 주인이 아니야. 그냥 아빠라고."

"한국은 유교국가거든? 배꼽인사는 나이 많은 사람한테 존경을 보이는 거야."

"싫어. 이거 안 했으면 좋겠어. 내일부터 원장 선생님이 배꼽인사 시키면 내가 애 등을 펼 거야. 그러면 알아듣겠지."

"어휴, 그냥 여기 문화려니 하면 되잖아. 한국식 예의를 배우는 게 나쁜 거야?"


이런 고집불통 독일 아저씨를 봤나.



국공립 유치원은 하원이 빠르다. 독일에서는 3시 반에 하원했는데 2시부터 아이와 놀아야 한다니 부담이 되었다. 또, 독일에서는 놀이터에 가면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는데, 한국은 놀이터에 나가도 6시는 되어야 아이들이 좀 나왔다. 어쩔 수 없다. 사교육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한국에 왔으니 태권도 정도는 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태권도장에서도 역시 아이에게 배꼽인사를 시켰다. 사범님에게 한번, 부모님에게 한 번씩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독일 아저씨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배꼽인사는 너무 비굴하다면서, 이 건 또 괜찮아?"

"응. 사부잖아. 사부한테는 예의를 보여야지."

"태권도 사범님에게는 예의를 지키고 유치원 선생님한테는 예의를 안 지킨다는 건 또 무슨 경우야."


남편은 갑자기 회로가 꼬였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동네 놀이터에서 만난 엄마에게 영어학원 앞에서 본모습을 묘사했다. 그러면서 빨간 카펫 깔아놓고 뒷 차 문 열어주는 것이 솔직히  "어깨들이 보스 의전하는 듯했다"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그 엄마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난 그건 괜찮아요. 근데 전 태권도장에서 애들한테 인사 강요하는 거 있죠? 그게 더 깡패들 같아요. 아니 왜 태권도 사범이 뭐라고 인사를 그렇게 받아요?"


이번엔 내가 회로가 꼬여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스쳐가는 엄마들에게 인사를 몇 번 씹히고 나서야 이 유치원 보호자끼리는 처음 보는 사람끼리 인사하지 않는 문화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자 동네에도 아는 사람들이 생기고 아침마다 인사하는 이웃들이 생겼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서서히 여기저기 모르는 사람과 만나고, 서로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그러다 동네 어린이 도서관에 가서는, 지금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에 다니다 퇴원하고 옆 영어학원으로 옮겼다는 가족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앗, 내가 흉보던 그 영어학원 덕분에 우리 애가 중간에 유치원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거 구나. 


이렇게 인생의 오묘함을 놓고 사색에 잠겨, 아이와 집에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보고 앞에서 엄마들 두 명이 "안녕하세요"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누구시더라? 열심히 기억회로가 돌아가는 사이, 나는 제대로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 뒤통수에 대고 "안녕하세요"를 외쳤다. 


난 아직도 그녀들이 누군지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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