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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Oct 14. 2024

금쪽같은 외동아들들

결핍의 결핍

4월 어느 날, 독일 유치원 친구 비욘의 엄마, 마티나에게 문자가 왔다. "우리 출국 전에 꼭 한 번 보자"면서 플레이데이트 날짜를 잡자고 했다. 금발에 세련된 외모의 마티나는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를 가졌고, 유치원 재단에서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돕는 특수교사로 일한다. 마더 테레사 같은 존재인 마티나는 고인물에다 마당발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견 없이 2년 연속으로 유치원 학부모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비욘의 가족은 조부모님이 은퇴 후 스페인으로 이주하시면서 물려받은, 잘 정돈된 정원이 딸린 2층집에 산다. 비욘 아빠는 비욘과 똑 닮았고, 하얀 테슬라를 몰고 다닌다. 우리 가족은 비욘네 테슬라를 자주 탔는데, 생일 파티나 초대받을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이 우리를 데리러 와줬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작 우리 아들은 비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비욘은 너 좋아하잖아. 왜 넌 비욘 안 좋아해?"


"비욘은 맨날 자기가 보스래. 자기 말 안 들으면 이제 친구 아니래. 자꾸 애들 때리려고 해. 그래서 아무도 비욘 안 좋아해."


독일 유치원은 카메라가 달린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밖에서 노는 일이 많아서 누가 때렸는지 알 방법이 없다. 게다가 아이들의 기억은 묘해서, 2살 때 맞은 일을 2년 뒤에 이야기하기도 한다. 비욘과 아들은 항상 잘 놀았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다른 엄마들에게 슬쩍 물어봤다.


"유치원에서 자꾸 애들 때리는 남자애가 있다던데, 누군지 알아요?"


"아, 알아요. 마헬 말하는 거죠? 그 애 전담 특수교사도 있잖아요."


오잉? 비욘이 아니라 마헬? 예쁜 미소를 짓는 엄마를 둔 5살 마헬. 마헬은 아직 독일어가 서툴러서 주먹부터 나간다고 했다. 너무 폭력적이다 보니 남자 선생님이 두 명인 반에 마헬을 위한 전담 교사가 따로 붙었다고 했다. 마헬이 유치원에 다닌 지 2년이 넘었는데, 할 줄 아는 말은 "Ja", "Nein", "Nicht" 이렇게 세 단어뿐이라니.


비욘을 싫어한다던 우리 아들은 다음 날 비욘네 집에서 밤이 될 때까지 신나게 놀고 왔다. 비욘 엄마는 우리가 한국에 있는 동안 아들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 유치원 들어가자마자 아들은 금세 친구들을 사귀었고, 3개월 내내 비욘의 이름은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 이안이 역시 외동인데, 체격도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해 둘은 늘 붙어 다닌다고 했다. 한국의 공교육 시스템에 감탄하던 우리 부부는 이안 덕분에 더욱 안심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 우리 부부는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놀러 다닐 수 있었다. 아이도 어른도 충전되는 시간이었다.


유치원 후에는 집 앞 태권도 학원에 다녔는데, ‘집 바로 앞’이라곤 하지만 차가 쌩쌩 달리는 6차선 도로를 건너야 했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의 하원 버스를 기다리는 부모님들을 볼 수 있었다. 엄마 아빠가 모두 나와 있는 걸 보니 이 집도 외동인가 싶었는데, 예상이 맞았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영준이란 아이가 노란색 버스에서 내렸다. 그러자 영준이 아빠가 외쳤다.


"영준아! 아빠가 친구 만들어놨다!"


당황스러웠지만, 태권도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길을 건넜다. 그렇게 엉겁결 친구로 정해진 동갑내기 아이들은 거의 매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한 달 내내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놀이터에 영준이가 왔다. 영준이는 그네를 타는 아이들을 그저 옆에서 지켜봤다. 다른 아이들이 잡기 놀이를 하면, 영준이는 가만히 서 있었다. 영준이는 혼자 겉돌았다. 그러다 영준이가 넘어졌는데, 영준이 엄마는 쏜살같이 달려와 영준이를 일으켜 세워 괜찮냐고 몇 번을 물었다. 그게 끝이었다. 그날 이후 영준이를 다시는 놀이터에서 보지 못했다.



독일로 돌아온 지 이틀째, 마티나에게 문자가 왔다. "점심 먹고 우리 집에 놀러 와." 비욘이 아들이 어제 도착한 걸 알고 연락이 없자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었다며. 하얀 테슬라가 우리 아들을 데리러 왔고, 아들은 비욘은 싫지만 장난감은 좋다며 신나게 다녀왔다.


그다음 날, 오랜만에 나간 독일 유치원에서 아이를 픽업하러 갔더니, 아이들은 밖에서 놀고 있다고 했다. 2층 창문 너머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보았다. 10월생이라 다른 아이들보다 힘이 센 비욘이 제일 작은 네 살짜리 아이를 구석으로 몰아 때리는 장면을. 비욘은 아이들이 열심히 만든 모래성을 무너뜨렸다. 작은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려고 하면 밀쳐내며 방해했다. 마티나가 아침마다 비욘에게 보여주는 애정공세, 부드러운 목소리가 비욘의 폭력성과 대비되며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요즘 외동들은 결핍될 겨를이 없다. 외동이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법한데, 가만히 있으면 엄마가 다른 집에 전화해서 놀이 스케줄을 잡아주고, 아빠는 친구를 차로 데려온다. 심지어 친구를 만들 필요도 없다. 아빠가 길에서 만난 아이들을 친구로 맺어주기까지 한다.


나는 다짐한다.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고. 선생님이 있는 안전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다툼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매일매일이 이벤트일 필요는 전혀 없다고. 그리고 우리 가족이 교외에 이사 가기 전까지는 절대 차를 사지 않겠다고. 지금까지 부족했던 나지만, 딱 하나 잘한 것이 있다면, 우리 외동아들을 얄짤없이 차 없이 고생시킨 일이다. 아장아장 걷던 시절부터, 아들은 추운 겨울에도 나와 함께 버스를 기다렸고, 1킬로미터 넘는 거리를 유모차 없이 걸었다.

3살 때 나랑 둘이 갔던 근성 여행


아들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친구를 사귀어?"

"음, 내가 먼저 같이 놀자고 물어봐."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어?"

"응, 가끔 안된다고 해. 그럴 때는 정말 부끄러워. 그런데 물어보지 않으면 친구가 생기지 않아."


아이들은 자란다. 나 없이 아주 잘. 외동을 키우는 나는 오늘도 그 사실을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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