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에도 시키는데!
독일은 사교육을 안 시킨다는 선입견이 있던데, 그건 정말 케바케다. 못 믿겠으면, 우리 아이가 다니는 센터에 와보길 바란다.
90년대 소비에트 붕괴 이후, 독일로 대거 들어온 이민자들을 지원하던 곳인데, 각종 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 발레나 현대무용은 기본이고, 체스, 영어, 음악, 미술, 수학, 발명, 심지어 루빅스 큐브 수업까지 있다. 수업 등록을 하러 간 날엔, 마치 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나 싶을 정도로 붐볐다. 아이 유치원 친구들도 여러 명 만났다.
여기 선생님들은 반쯤은 봉사 개념으로 수업을 하고, 정부 지원을 받는 단체라 원비가 저렴하다. 예를 들어 무용 수업은 한 달에 35유로고, 체스 수업은 30유로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대부분 구 소비에트 이민자나 그 2세 출신이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는 연극 수업을 시작했다. 딱 봐도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 하얀 장발의 선생님이 우리 모자를 보더니 무료 연극 수업이 있으니 나오라고 권유했다. 공짜라는데 뭐 어떠냐 싶어 그 자리에서 등록했다. 생각해 보니, 여기 선생님들은 단 한 번도 결근이나 지각을 한 적이 없었다. 독일에서는 병가를 내고 말도 없이 업무에 펑크를 내는 사람들을 너무 자주 봐서,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문제는, 수업에 난민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연극 수업에도 독일에 온 지 3개월밖에 안 된 아이들이 두 명이나 있었다. 결국 반은 러시아어, 반은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게다가 한 번 센터에 등록을 하면 취소가 안 되고 1년은 기본이다. 등록 자체도 관료주의 최강 독일답게 서류가 가득했다. 강좌 등록하느라 서류 붙잡고 한 시간을 실랑이했다. 물론 다른 학원들도 찾아보면 있다. 하지만 보내고 싶었던 한국 사범님이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은 집에서 차로 35분 거리다. 그냥 포기한다. 선택지가 없다.
사교육 천국이라는 한국에 가니 마치 탈북자가 코스트코에 온 기분이었다.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태권도장이 10개가 넘었다. 아이가 2년 전에 다니던 태권도장에 갔더니 사범님이 안 계셨다. 태권도장도 시장에서 거래된다는 걸 깨달았다. 상호는 같았지만 주인이 달라졌다.
그리고는 광고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맘카페 게시판과 블로그를 참고해 후보를 추려냈다. 결국 정보 과잉으로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아이 친구가 다닌다는 도장으로 갔다. 도장이 위치한 작은 건물은 지어진 지 10년이 안 됐다. 그런데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건지 들어가자마자 화장실 냄새가 났다. 하지만 학원 신발장은 아이들 신발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아래 편의점은 학원과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미용실은 막간을 이용해 아이들 머리를 다듬는 부모들로 북적였다. 건물 안은 아이들이 가져온 킥보드로 걷기도 힘들었다. 태권도 수업료는 이 동네 모두 동일, 주 5일에 18만 원이었다.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걸 찾다가 K-pop을 가르친다는 학원도 등록했다. 원장 선생님은 해외 박사 출신이었는데, 항상 피곤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말할 때 필터링이 안 되는 분 같았다. 피아노 수업은 돈이 안 된다는 둥,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학원의 재정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블로그에서 본 사진은 광학 렌즈로 찍었는지,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많이 작았다. 게다가 집에서 2km 이상 떨어진 곳이라 차로 다녀야 했는데, 태권도랑 시간이 겹쳐서 하원만 가능하고 등원 버스는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재미있어해서 일주일에 2시간, 태권도와 똑같이 18만 원을 주고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독일처럼 1년 의무등록 기간도 없고, 다니는 기간만 돈을 내면 되었다.
이상하게도 여기 독일에 사는 학부모들은 수업 시간 동안 대기실 소파에서 아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나가서 옆에 있는 도서관에 가던지, 슈퍼에서 장을 보던지, 커피라도 마시고 와도 되는데. 반면,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건물 안에서 기다리는 문화가 아니다. 나 역시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면 오롯이 내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에서 책도 빌리고 다이소도 가고.
또한 한국 학원은 피드백이 빠르고 많았다. 특히 태권도장은 마치 이분들이 사진을 전공했나 싶을 정도로 멋진 인생 사진들을 보내줬다. 우리 어머니 카톡 프사는 태권도 사범님들이 찍어주신 것이다. K-pop 학원에서는 매 수업마다 블로그에 아이들의 사진과 코멘트를 올렸다. 혼자서 수업과 동시에 사진까지 찍어야 하는 선생님이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반면, 독일에서는 유치원이든 학원이든 피드백을 받아본 경우가 매우 드물다.
사실 우리 부부 중에 사교육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은 독일인 남편이다. 남편은 유치원 때 학원을 단 하나도 다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유치원 때 배운 건 피아노 하나다.) 남편은 지금도 사교육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시부모님의 결정을 아쉽게 생각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어렸을 때 이것저것 많이 해봐야 한다는 철학을 설파한다. 시부모님은 "애가 힘들지 않겠니?"라고 걱정하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멘트다. 어떻게 하겠나, 세상이 바뀌었는데. 독일 유치원 친구들을 보면, 미술, 체육, 수영, 심지어 구몬 수학에 다니는 아이도 있다. (신기한 건 영어 조기 교육을 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전쟁을 피해 독일로 온 우크라이나 엄마들도 보내는 사교육의 현장에서 오늘도 생각한다. 아, 자식이 도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