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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Nov 01. 2024

한국에 온 내 친구

 만찢녀의 삶

여러 의미로 만화를 찢고 나온 사람들이 진짜 있다. 내 친구 이야기다. 이 친구의 인생사를 이야기하자면 아마 다들 “뻥치시네, 진짜야?” 할 거다. 그런데 진짜다. 방금 쓴 글에서 짧게 언급했던 그 친구다. 2001년에 처음 만났으니 벌써 알고 지낸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멀리 떨어져 살지만 몇 년에 한 번이라도 우리는 만났다. 인도에서, 미국에서, 러시아에서,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서.


엘리트 체육인 가족을 둔 내 친구는 (무려 올림픽 금메달이 있는 유명한 집안) 3살부터 전국 대회를 나갔다. 나보다 2살이 어린데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난 이 친구한테 수동 자동차로 운전을 배웠다. 옷 입는 법, 영어, 춤추는 법, 요리, 세탁, 설겆이하고 싱크대 싹 닦기 같은 건 엄마가 아니라 친구가 가르쳐 줬다. 친구는 내가 꾸미는 걸 못 한다고 늘 타박했지만, 내가 예쁘다고 한 옷은 꼭 사고, 내 안목이 좋다고 칭찬했다. 아마 코치 엄마 아빠를 둔 덕일 것이다. 당근과 채찍에 엄청 능했다. 


그리고 그녀 나이가 고작 32살이었을 때, 남편을 잃었다. 정말 개연성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인생이야기이다. 참고로 그녀의 국적은 러시아이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컸던 친구는 사별 후 러시아로 돌아갔다. 유명한 인도 가문과 결혼해 운전사와 요리사가 상주하던 집에서 살던 내 친구는 모스크바에 사는 싱글맘이 되었다. 모스크바 아파트 단지에 위치한 그녀의 집은 인도 집과는 많이 달랐다. 


영어를 잘하던 그녀는 국제학교 보조 교사로 취직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이후 모스크바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국제학교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내 친구는 인생 만찢녀다. 10대 혼혈 아이 둘을 키우는 싱글맘은 전 세계에 이력서를 뿌렸다. 그리고 당당히 중국에 위치한 국제학교에 아주 좋은 조건으로, 보조 교사가 아닌 정교사로 취직을 했다. 


친구는 내가 한국에 가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비행기표를 샀다. 1주일 동안 내 친정집에 머물렀다. 남편과 친구와 밤이면 밤마다 편의점에서 4개에 만원 짜리 제주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진정한 만찢녀, 걸 크러쉬의 교과서 같은 친구는 우리 부부 앞에서 엉엉 울었다. 




친구의 아들은 이제 15살이다. 러시아와 인도의 조합, 남쪽과 북쪽의 조합, 아들 역시 만찣남, 진정한 엄친아이다. 취미로 기계 체조를 한다는데, 무려 러시아에서 전국 순위권에 든다고 한다. 그런데 수학을 좋아해서 공대를 가는 게 목표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친구 딸은 바르셀로나 대학에 입학했다. 친구는 중국에서 스페인까지 와서 딸의 입학을 도왔다.) 그런데 전쟁이 끝날 줄을 모른다. 언제 아들에게 입영 통지서가 날아올지 모른다. 그리고 엄친아씨는 모스크바를 떠날 생각이 없단다. 즐거운 10대 시절을 보냈던 도시를 떠나 중국에서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면서.


"그 놈의 전쟁! 내 친척 반이 아직도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모기를 쫓아가며 열심히 맥주를 따르는 것뿐이었다.


친정 엄마는 친구의 아들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에게 말했다. 


"절대로 네 친구가 돈 쓰게 하지 마라. 알았지? 여기 있는 동안은 네가 다 내."


그래서 친구가 한국에 있는 일주일 동안, 동대문과 잠실, 명동과 종로, 강남과 성수를 다니면서 친구가 일상을 잠시라도 잊기를 바랐다. 5월에는 온갖 행사가 다 있었고 날씨 역시 너무 좋았다. 그러다 광화문 앞에서 외국인들을 위해 무료 한국 작명 부스를 발견했다. 재미로 보는 거라고 안내문이 있었는데, 통역하는 분까지 옆에 있었다.


K 역술인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광화문 광장에서 물놀이를 해 버린 아들의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하지만 15분이 넘었는데도 친구가 오지 않자 잘 있나 싶어 친구를 찾으러 갔다. 한국 이름을 받으러 간 친구는 아직도 이야기 중이었다.


작명가와 통역사는 내가 인사를 하자 친구 옆에 앉으라고 했다. 친구가 인생에서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아 보인다고 했다. 그냥 흘려 들으라며 사주 얘기도 좀 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더니 친구는 이미 다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었다. 



오늘 나는 두 여성을 만났다. 한 분은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한 분은 모스크바에서 왔단다. 항상 붙어 다니는 20년 지기 친구란다. 둘 다 이미 손주가 있으며,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굉장히 유쾌하신 분들이다. 둘은 서로의 눈빛만 봐도 웃긴가 보다. 끊임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그녀들을 지켜보았다. 몇 년 전만 해도 다 이러고 살았다. 그냥 다들 친구고 이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엄친아씨가 최근에 엄마를 따라 중국으로 이사 오는 것에 동의했단다. 이 모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중국에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친구에게 혹시 모르니 한국 국제 학교도 알아보라고 얘기했다. 정착할 때 내 지인들 총동원할 테니 아들을 꼭 데리고 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얼마전에 친구 역시 한국이 너무 좋았다면서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나도 장문의 문자와 함께 스페인 대학에 입학하는 그녀의 딸에게 용돈을 조금 보냈다. 친구라 해봤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뭐가 스토리가 왜 이렇게 굴직굴직한가.


그녀의 삶이 무난 무탈하기를. 이제 좀 덜 역동적이길. 친구의 삶이 이제 좀 심심해지길 간절히 빈다. 

2016년 모스크바


(사진주인: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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