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려치지 않기
아이 바지가 다 작다. 아끼던 청바지가 발목 위로 올라오는 걸 보고 독일의 당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베이를 뒤졌다. 그냥 아마존에서 새 옷을 사면 금방 오겠지만 웬만하면 아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중고 옷을 사서 입으려고 노력한다.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다. 내가 돈이 아주 많아도 옷은 중고를 살 거 같다. 근데 몇 시간을 뒤져봐도 별로 사고 싶은 게 없다. 한국 당근에서 만원만 있으면 정말 상태 좋은 옷을 너무 많이 구해서 행복했는데 독일 온라인 중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옷들은 너무 허접하고 비싸다. 우리 동네만 그런가 싶어서 베를린을 검색했는데 여기도 만만치 않다. 진짜 별로인 거 같은데 2벌에 25유로?
요즘 드는 생각인데 독일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아주 높게 평가하는 거 같다. 객관적(?)으로 봐서는 영 아닌데도 올려치기가 강하다. 게다가 한국 사람도 독일에 오래 살면 그렇게 되나 보다. 동네에서 처음 만났던 한국분이 자기 아이들이 이제 안 보는 책이라며 싸게 판다고 집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그 집에서 확인하니 마구잡이로 쌓여있는 책더미들은 정말 엉망이었다. 구겨지고 찢어진 건 말할 것도 없고, 하도 오래되어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이라고 떡 하니 적혀 있기까지 했다. 뒤를 보니 출판일이 무려 1999년이었다. 유일한 한국 이웃은 한국에서 들고 오느라 힘들었고, 정말 아끼는 건데 특별히 싸게 주는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워낙 특이한 분이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패기 하나는 높이 사야 할 것 같다. 이웃은 한국에서는 재활용 쓰레기로 직행해야 하는 책 더미들에 150유로를 불렀다. 그 뒤 최신판 깨끗한 한글책 전집이 독일에서 50유로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 유치원을 자체 휴강하고 아이와 춘천 박물관들에 들렸다. 우리나라에서 단위 인구당 박사가 제일 많이 나왔다는 박사마을을 지났더니 애니메이션 박물관과 로봇 박물관이 나왔다. 헬로카봇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한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그런데 평일 아침에 찾아가긴 했지만 로봇 박물관에는 사람이 우리 밖에 없었다. 좀 맥이 빠졌다. 아쉽게도 방문자들이 참여할 수 있게 흥미롭게 만든 박물관 안 전시된 로봇들은 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게임도 있었는데 필요한 장비들이 없었다. 되는 게 별로 없으니 아이가 결국은 지루해했다. 로봇 드론 공연에 너무 사람이 없어서 일부러 박수를 크게 쳤다. 1시간도 안되어서 밖으로 나왔다. 박물관 루프탑 카페 역시 굉장했다. 내가 한국에서 가본 카페 중에 가장 뷰가 멋졌다. 하지만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애니메이션 박물관에는 우리 말고 딱 한 팀이 더 있었다. 워낙 사람이 없는지라 태권 브이 주제가를 아이가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될 만큼 마음껏 틀 수 있었다. 엄마가 어렸을 때 봤던 둘리 같은 만화들을 아이에게 소개해 주었다. 찬찬히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한 그림에 걸음을 멈췄다. 신동우 화백의 홍길동 스케치였다. 온몸이 반응했다. 거침없는 펜 선이 정말 너무 마음에 들었다."멋지다"를 연발했다.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발견하다니! 이름만 들어본 애니메이션의 스케치마저도 정말 박력이 넘치고 내공이 흘렀다. 한국에는 정말 대단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구나! 이런 멋진 그림들을 원본은 못 사면 카피라도 사서 집에다 걸어놓고 싶었다. 빨리 기념품 가게에 가야겠다. 맘에 드는 그림이 너무 많은데 오늘 돈 좀 쓰겠다 싶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개척자의 도록이면 얼마정도 하려나? 5만 원은 안 넘었으면 좋겠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래층 기념품 가게 갔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것은 황량함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신동우 화백의 그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니 한국 애니메이션에 관한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아래 사진에 나온 그대로이다.
없다.
기가 막혔다. 명색이 한국 애니메이션 박물관인데, 진짜 이게 다라고? 사람들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구경한 후, 돈을 내고 사려고 하는 것이 고작 헬로키티인형이라고?
이건 정말 아쉬운정도가 아니라 비참할 지경이다.
고백한다. 나도 여기 오기 전에는 신동우 화백의 존재도 제대로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니메이션 박물관에서는 한국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포스터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철저히 잊히고 있을 줄이야. 절판된 책을 중고로 사는 방법 외에는 신동우 화백의 그림을 소장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 나에겐 없다. 유튜브에 신동우 화백의 아들이 운영한다는 채널이 있긴 하다. 담배 하나 물고 한 손에는 붓, 한 손에는 드라이어를 들고 쓱쓱쓱 그림을 그려나가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다. 이 분 정말, 너무 멋진데 왜 더 이상 볼 수가 없고 더 많이 언급되지 않지? 바로 옆에서 일본 만화가 저만치 앞서가고 있던 60년대 70년대에 독특한 개성을 가진 그림을 완성한 독보적인 인물. 이 정도면 지금 보다 훨씬 더 제 값을 쳐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한 때는 연예인 같은 인기를 누리며, 국민 화백으로 불렸던 분을 훨씬 더 오래 기억해야 되는 거 아닌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증권 시장에만 있는 게 아닌 거 같다. 이렇게 멋진 것들이 널려 있는데. 자꾸 내가 자란 공동체와, 가치와, 문화의 값을 후려치고 밖을 기웃거렸던 나부터 엄청 반성했다. 진짜 뼛속까지 후려치기다. 좀 뻔뻔하게 느껴지더라도 당당하게 제 값을 받고 지불하는 연습, 지금이라도 하면 늘려나.
(사진 주인 :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