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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Oct 25. 2024

독일에 상륙한 K 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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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서로를 안 보면 이상할 정도로 친해진 아이들. 어느 날씨 좋은 여름날, 자기들 만의 "비밀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엄마들이 이제 집에 가자고 소리를 지르자 한동안 안 보였던 아들이 시무룩해서 나왔다.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 초등 1학년인 친구 형이 더하기 빼기 산수 문제를 내고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줬단다. 친구들은 다 메달을 받았는데 (스티커) 자기는 "빵점"을 맞아서 선물을 못 받았다고 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우선 아들을 달랬다. 


"넌 한 번도 이런 거 안 해 봤잖아. 너도 연습하면 되지. 1 더하기 5는 뭘까?"

"몰라."


아이의 슬픈 얼굴을 본 형아가 나와서 말했다. 


"괜찮아. 너 산수 말고도 잘하는 거 있을 거 아니야."


카리스마가 넘치는 초등 형아의 지혜에 감탄하며,  내 옆에 앉아 손자를 기다리시던 아이 동갑 친구 할머니께 우리 애가 산수 빵점 맞아서 저리 입이 나왔다고 말씀드렸다.


"우리 손자가 글쎄 넘버블럭스를 열심히 보더니 이러더라고. 만 세 살 때. 우리 집은 9층이네? 그럼 3 곱하기 3? 벌써 곱하기를 이해한다니까? 호호호"


역시 K할머니들은 정보의 보고이다. 3개월 동안 놀이터에서 친해진 할머니들 덕분에 많은 가족들의 신상과 재정상태와, 동네 아이들의 학습 수준까지 다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교구, 장난감, 영어 학원 같은 정보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다. 그건 그렇고 넘버블럭스를 봤더니 곱셈을 한다고? 독일에서 넷플릭스에 있는 걸 아이에게 잠깐 보여줬었는데 아이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친구네 집에 놀러 간 아이는 넘버블럭스 장난감을 처음 보았다. 그 후 내 당근 검색어로 넘버블럭스가 올라갔다.


당근으로 구한 넘버 블럭스 장난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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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에서 돌아온 지 3개월이 되었다. 아이는 그동안 키가 훌쩍 자라 벌써 120cm다. 이제 앞니가 흔들거린다. 다음 주면 빠질 거 같다. 그리고 아이는 요즘은 일어나자마자 영어로 넘버블럭스를 본다. 맨 처음에는 넷플릭스 한국말 더빙으로 보다가 에피소드가 20개밖에 안되자, 독일어로 넘어갔다. 그러다 영어 에피소드가 훨씬 많이 있다는 걸 깨닫고 영어 넘버블럭스를 틀어 달라고 했다. 영어도 못하면서 쓰리 타임스 쓰리 이퀄스 나인을 외치기 시작했다. 잘 때는 구구단 노래를 틀어 달라고 한다. 


뽀로로, 자동차의 계절은 이미 가 버린 지 오래다. 변신 로봇 시절도 이제 퇴색하는 거 같다. 나뭇잎의 색깔이 바뀌자, 이제 숫자의 계절이 왔다. 시계를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자 아이는 집에서 유치원까지 몇 초 걸리는지 알아야겠다며 1부터 숫자를 센다. 버스 안에서 한국말로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 삼백삼십삼, 삼백삼십사, 삼백 삼십오. 어디를 가던 숫자 얘기만 한다. 


"엄마 1 더하기 2 더하기 3 더하기 한 다음에 100까지 다 더하면 얼마일까요?"


그리고 한국 놀이터에서 처음 접한 K 산수는 독일 유치원에도 스멀스멀 상륙하고 있다. 어쩌랴. 한국 친구들의 숫자 놀이가 독일 사는 우리 아이까지 전파되어 버린 것을. 아들은 이제 독일 아이들에게도 놀이터에서 같이 놀던 한국 형아처럼 산수 문제를 내고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내린다. 집에 가는 아이들에게 복도에서 2 곱하기 50이 뭔지 아느냐고 묻는다. 말려도 듣지를 않는다. 


한국의 한 여름날이 바꾸어 놓은 독일의 가을 풍경이다. 떠나와 있지만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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