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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May 04. 2023

독일 찐 상류층은 어떻게 살까

진짜 몰랐어요

오늘 오후 가비를 만났다.


믿을 수 없지만 벌써 10년이 넘었다. 가비는 내가 사는 이 도시에 처음 이사 왔을 때 만났다. 20대가 대부분이었던 "인터네셔날" 직장인 (라고 쓰고 뜨내기라고 읽습니다) 네트워크 모임에서 가비는 눈에 확 띄었다. 유창한 영어실력이 그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오는 우아함이 그랬다. 쪽진 은발 머리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날씨가 좋으면 지붕을 열고 검은색 BMW를 몰고 다녔다. 그때 가비는 70살이었다. 


가비는 도시에 있는 핫플을 꾀고 있었다. 비싸고 사치스러운 곳이 아니라,  제철 산딸기를 곁들인 10유로짜리 샐러드 맛집이나 작고 귀여운 병에 담긴 달콤한 이태리 소다가 있는 지하 구석 디저트 카페 같은 곳을 나에 게 소개해 주었다. 가비는 나와 SPA브랜드에서 서로의 옷을 골라주기도 했다. 가비가 거리를 걷고 있으면 사람들이 감탄사를 보냈다. 독일 사람들이 누구를 대놓고 칭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던 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신기했다.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것 같은 가비의 집은 센스 넘치는 그녀를 꼭 닮았다. 고풍스러운데 현대적이고, 아기자기하면서도 고급졌다. 남편과 사별했던 가비는 혼자 살았는데 집 자체는 크지 않지만 연못까지 딸린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가비가 차려준 아침식사


나의 장기 해외 체류와 코로나 등 때문에 오랫동안 가비를 직접 만나지 못하다가 몇 달 전에 가비가 안부를 묻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답장을 쓰려다가 남편의 직장 바로 옆에 위치한 가비의 집에 직접 쓴 카드를 보내기로 했다. 남편에게 회사 가는 길에 카드를 가비내 집 편지함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이 말했다.


"오늘 카드를 넣으면서 가비 이름을 봤거든? 가비 성이 XXXXXXXX 더라. 설마 내가 아는 XXXXXXXX는 아니겠지?"

"왜? XXXXXXXX가 유명해?"

"유명하지. XXXXXXXX는 엄청 오래된 회사야. 독일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 가비가 부자란 건 알겠는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


남편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가비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봤다. 


가비는 한국에도 지사가 있는 독일 회사의 전 대표였다. 100년이 넘는 가족기업, 가비가 60살 때 세상을 떠난 남편의 성이 회사명인 그 회사. 가비는 기업변호사로 일하던 아들에게 10년 전에게 회사를 넘길 때까지 대표로 있었다. 가비네 이름은 어느 도시의 도로명이기도 했다. 가비가 말했던 "애들이 어렸을 때 살던 시골집"은 가비네 가족이 떠난 지금도 "XXXXXXXX 빌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비는 이제 84살이 되었다. 가비의 한 올 한 올 올린 속눈썹과, 샤넬 립스틱, 쪽진 은색 머리는 그대로인데 허리에 문제가 생겨서 그야말로 꼬부랑할머니가 되었다. 가비는 허리 때문에 받는 PT 중 잘못 넘어지는 바람에 갈비뼈 하나가 부러지고 폐에 물이 찼다고 했다. 이게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도 가비는 커피를 직접 준비하겠다고 했다. 쟁반은 아직 들기가 힘들다며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10년 전에 찍은 가비의 집. 오늘도 그대로이다.


튤립이 지고 있는 5월의 정원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정원 연못 주위에 예전에는 없었던 울타리가 보였다.


"내가 손주가 7명이잖아."


가비가 웃었다.


84살에도 자녀들의 육아를 돕는 가비와 애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토론했다. 가비의 부모님은 아이들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얘기를 할 때는 집에서 프랑스어를 썼다는 이야기, 어떻게 하다가 40대의 가비가 11살이던 딸과 함께 개방 전 중국에서 중국어를 배우게 되었는지, 남편과 사별하고 60살 때 혼자 이태리에 건너가 이태리어와 요리를 배운 얘기를 들었다. 가비는 아르헨티나 며느리 덕분에 손주와 스페인어로 대화해 왔는데 요즘 애들이 독일어만 쓰려고 해서 아쉽단다. 여행은 돈을 적게 써야 로컬의 삶을 알 수 있어 기억에 더 남는다는 지론을 펼치기도 했다. 84살 꼬부랑 할머니 가비는 여전히 젊고 재미있고 아름다웠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던 가비. 슈퍼에서 1유로에도 벌벌 떠는 가난한 나는 가비의 친구라는 사실이 기뻤다. 커다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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