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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May 05. 2023

자전거를 타고 가는 너를 보며

어린이 만세

시아버지가 아이를 위해 첫 자전거를 선물해 주셨다. 한 달 전부터 전화기가 울리기는 했는데, 막상 선물을 본 우리는 입이 벌어졌다. 경주용 자전거로 유명한 회사에서 나온 14인치 어린이용 자전거를 아이가 좋아하는 소방차 테마로 래핑 작업까지 하셨다. 



소싯적에 자전거로 100km를 하루 만에 달린 적이 있다는 시아버지는 이제 거동이 불편하셔서 자전거는커녕 100미터를 걷는 것도 힘들어하신다. 젊은 할아버지가 돼서 손주랑 자전거 여행을 하는 게 꿈이어서 일찍 결혼을 했다는 시아버지는 첫 손자가 생기는데 무려 15년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셨을 것이다. 


둘 다 학생일 때 만나 결혼하고, 아이가 안 생기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다. 남편은 내 방랑벽을 인정해 주었다. 혼자서 며칠간 하는 음악 페스티벌도 가고 한 달 넘게 동생이랑 카우치서핑으로 인도를 여행하기도 했다. 불만은 없었다. 그냥 이렇게 남편이랑 고양이랑 사나 보다 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생겼다.



독일에서 임신 테스터기를 확인했을 때 나는 대학원에서, 그것도 독일도 아닌 영국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요즘은 다들 한다는 사진 촬영이니 태교 여행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게다가 혈액 검사 후 의사는 나의 혈소판이 비정상적으로 낮다고 얘기했다. 제왕 절개 같은 큰 수술은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매일 아침 배나 허벅지에 커다란 주사를 맞았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픈 주사라 내가 직접은 못하고 남편이 주사를 놔주었다. 배가 누가 때린 것처럼 멍이 들어 시퍼레졌다. 높은 유산 위험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지도 교수에게 얘기했다. 나는 박사 과정 마지막 학기에 임신을 하는 한심한 학생이었다.


매일매일 부엌 식탁에서 논문을 썼다. 최소한 임신 태교 백과 같은 거 정도는 읽어 줬어야 했는데 난 그럴 여유도 없었다. 아이가 나오기 전에 어떻게 하든 논문을 끝내야 했다. 내 몸은 자꾸 이상해져 갔다. 혈소판 수치는 돌아오지 않았고 당뇨가 의심된다고 했다. 고위험군 산모라 산부인과에서는 자꾸 나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 검사를 시켰다.  


그리고는 임신 31주, 응급차에 실려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아이의 몸무게는 아직 2kg가 안된다고 했다. 혹시나 몰라서 병원 밥을 최대한 많이 먹었다. 독일 병원 밥은 아침저녁 메뉴가 365일 똑같다. 빵, 버터, 소시지, 요구르트, 잼, 사과, 뮤슬리. 맨날 똑같은 메뉴인데 간호사들이 아침마다 와서 내가 오늘은 뭘 먹을지 종이에 체크하라고 시켰다. 독일 간호사들은 나에게 한국같은 나라에도 이렇게 큰 종합병원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이었다면 이런 병원 밥을 줬다가는 가루가 되도록 까일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입원 일주일 후 제왕 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의사의 결정부터 출산까지 딱 40분 걸렸다. 혈소판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몸조리할 겨를도 없이 6주 동안 매일 병원으로 가서 아이에게 몇 시간씩 한 자세로 캥거루 케어(엄마의 품에 이른둥이를 안아주는 것)를 했다. 아직 아이가 엄마 젖을 빨 힘이 없어 콧줄로 모유와 우유를 넣어줘야 했다. 저녁에 집에 오면 밤에도 세 시간에 한 번씩 유축기를 세팅했다. 잘 나오지도 앉는 모유를 모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모유가 나올 동안 벼락치기 하는 마음으로 육아 유튜브를 시청했다. 나중에 내 임신과 출산 과정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깨닫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 후 4년이 지난 어린이날 아침, 아이는 빨간 자전거를 타고 1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에 있는 유치원에 등원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남편은 아이가 백페달로 브레이크 잡는 법을 숙지했는지 다시 확인한 후 자기도 자전거에 올랐다. 모든 게 다 고마웠다. 두 남자의 자전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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