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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Oct 27. 2023

독일 유치원에 간 김밥 도시락

토닥토닥

아들은 2020년 9월부터 유치원에 다녔으니 이제 3년이 넘어간다. 입학면담시간에 유치원에서 허용하는 간식 리스트를 받았다. 우선 하얀 탄수화물은 안된다. 정제당? 잼? 초콜릿 스프레드? 누텔라? 당연 안된다. 하얀 빵 역시 불가다. 건강한 간식을 보내라고 그러면서 "민족 전통 음식일 경우 예외 허용"이라는 단서 조항이 하나 붙어 있었다. 


처음 만난 선생님들은 40대의 베테랑들로 꽤 엄격했다. 아이들에게 좀 차갑게 군다고 느껴질 정도로 규칙을 강조했다. 부모들은 갑질은커녕 선생님들 눈치를 볼 지경이었다. 어쩌다 하얀 크래커나 하얀 식빵을 보낸 부모들은 복도에서 꾸중을 들었다. 나도 너무 단 과일을 많이 보냈을 때 애가 설사를 할 수 있다고 몇 번 지적을 당했다. 


내가 보통 자주 싸주는 것은 삶은 계란, 파프리카와 오이, 통밀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다. 독일은 과일 값이 꽤 싼 편이라 제철 과일 넣어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요즘은 애가 감이랑 밤을 워낙 좋아해서 며칠 째 넣어주고 있다. 오늘은 버터, 햄, 치즈만 넣은 샌드위치랑 사과를 싸서 보냈다. 사실 도시락을 안 먹고 그대로 오는 경우도 다반사다.  보통 유치원 아침식사 시간에 도시락을 같이 먹는데 과일과 차, 우유가 따로 제공되고, 점심식사는 샐러드에 디저트까지 나오니 놀기 바쁠 땐 도시락을 열어보지도 않는다.  


그래도 3년 동안 쌓인 노하우가 있어서 그런지 가끔씩 칭찬도 듣기도 했다. 급식 담당하시는 분이 나를 보더니 "가장 아름다운 도시락"을 보낸다 하셔서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동시에 멋쩍었다. 한국 도시락들을 작년에 아이를 한국 유치원을 보낼 때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캐릭터 도시락은 인스타용 아니었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유치원 사진첩을 보니 소풍에 이렇게 소박한 도시락을 보낸 건 나뿐이었다. 독일 부모들은 한국 유치원 도시락 보면 진짜 기절할 거다. 한국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독일 유치원 도시락들을 보면 기절할 거다. 아니 진짜 이게 다야?

어후, 독일 부모님, 이거 너무 신경 쓰신 거 아니에요? (출처 : https://www.medienwerkstatt-online.de)


  


그런 와중에 독일에 왔던 친정엄마는 아이의 유치원에 가보고 매우 맘에 들어하셨다. 자랑을 좀 하자면 유치원은 숲 옆에 있으며 딱 봐도 환경친화적이게 생겨 작년에 건축상까지 받았다. 안에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는 매우 저렴하고 맛있는 카페도 있다. 만 4살부터 6살까지가 모여 있는 아이의 반은 좀 특이한데 남자 선생님이 두 명이나 있다. 둘 다 키가 2미터에 가깝고, 럭비공이나 농구공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친정엄마는 선생님들을 보더니, "우와, 진짜 잘 생겼다!"라고 하셨다. 게다가 선생님들은 친정엄마를 매우 환영해 주며 자주 들리시라 했다.


뭐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그다음 날 친정엄마는 김밥 도시락을 만드셨다.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우엉을 볶고, 오이 물기를 짜고, 계란 지단을 준비하셨다. 일어난 아이는 김밥을 보고 환호했다. 내가 3년 동안 한 번도 안 해봤던 도시락 예외 조항, 하얀 쌀밥이 들어간 민족 전통 음식 김밥이 드디어 아이의 도시락 가방에 담겼다.



대만계 미국인 에디 황 (Eddie Huang)의 경험을 담은 프레시 오프 더 보트 (Fresh off the Boat)란 드라마에는 엄마가 점심 도시락으로 싸 준 볶음 국수를 보고 백인 아이들이 냄새가 이상하다, 지렁이처럼 생겼다 어쨌다 하면서 놀리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에디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엄마에게 백인 도시락을 싸달라고 부탁한다. 엄마는 "백인 도시락이 도대체 뭔데?"라고 묻고 에디와 엄마는 악명 높은 런처블스(Lunchables)를 사러 손을 꼭 잡고 슈퍼마켓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난 저거 먹느니 국수 먹을래. (출처 : Flickr, Youtube)


또한 틱톡에서 유명해진 한국계 변호사/비건 요리 전문가 조안 리 (Joanne Lee Molinaro) 역시 점심 도시락으로 가져간 김밥을 보고 아이들이 냄새난다고 놀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한다. 조안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제 미국에서 한국 냉동 김밥이 매진행렬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정말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독일 사는 한국 부모들끼리도 얼마 전에 비슷한 고민이 들렸다. 도시락으로 싸 간 참치마요 김밥이 역겨운 냄새가 난다면서 애들이 한국 아이를 놀렸다는 것이다. 타인의 음식 냄새를 역겹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잔인하게 편견과 차별을 내보이는 방법이 있을까 싶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들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약간의 각오는 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의 김밥 도시락 데뷔, 잘 될 수 있을까? 



아이를 데리러 간 오후, 혹시나 싶어 친정 엄마에게 핑계를 대고 집에 계시라 했다. 엄마에게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표정을 보니 평소와 다르게 시무룩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교실 쪽을 쳐다보자 담임선생님이 복도로 나오셨다. 


"저 어머님, 오늘 김밥을 도시락에 싸 주셨죠?"

"네, 저희 아이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저 그게, 아이들이 김밥을 보더니 하나씩 다 집어가 버려서 XX가 김밥을 하나도 못 먹었어요. 제가 애들한테 그만하라고 주의를 주긴 했는데 다들 먹어보겠다고 덤비는 통에 이렇게 되었네요."


생각지도 않았던 결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애들이 다 뺏어가서 김밥 하나도 못 먹었어."

"어이구, 우리 아들 걱정 마. 집에 김밥 아주 많아. 빨리 가자!"


그리하여 그날 저녁, 친정 엄마는 배가 불러 못 먹겠다고 할 때까지 손주에게 김밥을 싸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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