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 Nov 17. 2020

허용적인 부모와 엄격한 부모. 선택은?




난 부모님께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다. 대부분 내가 원하는 것이면 부모님께서 양보해주시거나,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꿔주셨다.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랐다. 또 잘못한 것이 있으면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라는 얘기로 넘어간 일도 많다. 아스팔트 길 성장이다. 자갈길이 나오면 부모님이 먼저 가서 길을 다시 아스팔트로 바꾸고, 그 후에 내가 지나갔다. 중간중간 어쩔 수 없는 굴곡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잘 지나갔고, 흘러갔다. 남편은 많이 혼나며 컸다. 맞은 기억도 많은 것 같다. 학교에 다닐 때는 부모님이 학부모 상담을 한 번도 가신 적이 없다. 군대 때 면회 한번 간 적이 없다. 제대 후에는 용돈을 주시지 않아 스스로 아르바이트하며 어렵게 공부를 했다. 하는 일, 시도하는 일마다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시도한 후에도 본인이 책임져야 할, 울퉁불퉁 자갈길을 꾸역꾸역 걸어가야만 하는 어린 시절이었다.

육아서를 읽다 보면 아이를 혼내지 말고, 인정해주며, 공감해주어야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강조한다. 기준을 찾아 아이가 넘었을 땐 알려주고, 넘지 않은 범위까지는 허용적으로 아이를 대해주라고 한다. 그런데 다른 환경에서 큰 우리 부부. 어른이 된 우리는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랑스럽게 여겨지던 나의 성장환경이 결코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른이 되니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졌다. 항상 부모님의 우산을 쓰고 있던 나는 선택해야 할 때 큰 두려움을 느낀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이게 맞는 선택일까?' 헷갈린다. 정답지를 보고 싶은데 정답이 없는 게 인생이다. 어릴 땐 부모님이 대부분 결정해주고, 그것만 따르면 됐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책임지고 내가 결정한 부분에 대해 행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선택하고, 부모님께서 했던 자갈길을 아스팔트로 바꾸는 일을 내가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두려움을 느낀다. 남편은 선택할 일들이 감당 가능한지 안 한 지 가누어본다. 그리고 괜찮은 선택이고, 감당 가능한 일이라면 리스크가 많아도 저지른다. 해결하려고 한다.
두려움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융통성이 없음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방법이 아니면 어떻게 길을 걸어야 할지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대로 되지 않으면 난 좌절하고 만다. '아, 선택이 잘못되었구나. 어떻게 하지?'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만난다. 남편은 '그 방법이 안돼? 그럼 이 방법은 어떨까? 그것도 안되면 ~을 해보자.' 좌절이란 없다. 끊임없이 문제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남편 뒤에서 찌그러져 있는 나를 보며 안타깝게도 생각한다.

누구나 칭찬의 장점을 말하며 실천하라고 한다. 칭찬의 단점은 알려주지 않는다. 칭찬과 함께 기준을 두고 어떤 훈육을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부모가 아이에게 알려줘야 하는지 잘 알려주지 않는다. 아마 우리 엄마도 육아서를 읽으며, 칭찬의 장점만을 봤을 것이며 -엄마는 나보다 융통성이 더 떨어진다.- 책대로 나를 키우셨을 것이다. 칭찬으로 대부분 컸던 내가 현실의 나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아기 같을 때가 많다. 주변에 인정받고 싶어 안달일 때도 많다. 외재적 만족이 큰 사람이다. 반면 반대의 상황에서 컸던 남편은 내재적 만족이 크다. 스스로 해냈다는 만족감이 크다. (부모님의 인정은 예외다. 성장환 경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 나는 사람들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고 누구나 느낀다. 남편은 그렇게까지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는 내 차례다. 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사랑은 듬뿍 주되, 기준을 정해 기준의 범위 속에서는 최대한 허용적으로 키운다. 기준을 벗어난 행위에 대해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기회를 줘야 할 것이다. 부모가 도와줄 것은 아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말과 따뜻한 포옹이다. 어릴 때 부모가 해결해주는 것이 당연해도, 아이의 나이가 달라지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아이가 점점 클수록 선택하는 범위를 넓히고, 이에 따른 책임의 범위도 함께 넓혀준다. 중용을 지키되, 범위는 넓히는 것이다. 사랑을 듬뿍 받아 자존감이 높고, 그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고, 어려운 선택에서 해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스스로 지니게 되는 아이. 그게 내가 바라는 사람이자 내가 바라는 아이의 미래 모습이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