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여행
갈 길이 바쁜 사람들에게는 풍경도 사치라고 봐야할까...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시절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한 참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하러 외국 오면 바깥 풍경이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온데이."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지만 김영삼 대통령에 관해 기억에 남는 일화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 의미가 무슨 말인지 몰랐고, 얼마 전까지도 알지 못했다.
며칠 전, 업무가 있어 서울을 방문하였다.
해가 뜨기도 전인 아침 일찍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해 가고 있었다.
중요한 일이라 버스 안에서도 노트북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해야할 일과 꼭 전달해야 할 내용을 복기하다 보니
어느새 오른쪽으로 타워팰리스가 보였다.
'아, 벌써 서울에 도착하였구나...'
4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바깥을 본 기억도, 무엇을 봤는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반복해서 업무에 집중하다보니
고속버스에서 내릴 때 노트북 화면을 연 채로 내리고 말았다.
대합실에 앉아 마무리를 하고, 한숨을 쉬고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오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서울에 오니 사람이 이렇게 많네...'
3호선을 타고 안국동으로 가는 길.
버스 안에서 한숨도 쉬지 못한 탓인지
지하철을 타서도 멍하기만 하였다.
그 덕에 3호선을 타고 지나갈 때마다 보이는
한강과 유엔빌리지의 풍경도 놓치고 말았다.
'요즘 해가 일찍 지니까 야경은 꼭 봐야지...'
저녁 식사 일정까지 마무리하고
수서역으로 향하는 3호선 안.
하루 종일 몰두한 일로 인해 지친 탓에 일찍 자리를 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인터넷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수시로 들여다보는 휴대폰이지만,
이 날따라 인터넷 기사를 봐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기사를 몇 개 보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대치역.
'아, 한강의 야경을 놓치고 말았구나...'
마스크 안의 내 입에서 실소가 나왔다.
'나는 오늘 뭘 했길래 한강 한번 제대로 못 봤을까...'
수서역 SRT에 오르고 보니 하필 SRT는 한참 동안
터널만 통과하고 있었다.
천안아산역 즈음 오니 그제서야 바깥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김영삼 대통령의 말이 생각났다.
일하러 오면 바깥 풍경이 하나도 안 보인다는 그 말.
이 말이 떠오르고 나서 동대구역에 내릴 때까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다 보니
참 맞는 말이고, 겪어봐야 이해가 가는 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새벽 4시 조금 넘어 일어난 하루였지만,
바깥 풍경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나의 하루.
출발하는 고속버스에서 나오는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내게는 비껴가버린 하루.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갈 길 바쁜 사람에게는 풍경조차 사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던 하루.
푸른 산, 색깔이 변해가는 나무들의 모습을 보면서
버스와 기차 밖 풍경을 즐기던 시절은
조금씩 멀어져가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여행 아닌 여행은 18시간 만에 끝이 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