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여자도 아닌' 민정의 이야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곧 그 사람을 잘 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향한 애정은 그에 대한 앎의 크기와 반비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흔히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첫눈에 반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오죽하면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란 조어까지 생겨났겠는가. 그러고 보면 “연애 초반이 가장 설렜다”거나 “신혼 때가 가난했을지언정 행복했다”는 유경험자들의 증언(?)도 괜한 말은 아닐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민정(이유영 분)은 바로 이 명제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인물이다. 영수(김주혁 분)와 연애 중인 민정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소문 때문에 그와 다투고, “각자 시간을 갖자”고 말한 뒤 그를 떠나 연락을 끊는다. 이런 민정 앞에 동네 유부남 재영(권해효 분)과 영화감독 상원(유준상 분)이 차례로 나타나 ‘아는 척’을 한다. 그때부터 민정은 낯설어진다. 세 남자에게도, 관객에게도.
편의상 ‘민정’이라고 통칭하지만, 사실 영화에서 민정은 민정이면서도 민정이 아니다. 어쭙잖은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그는 카페에서 “민정아”라고 반가워하며 다가오는 재영을 보고 “사람 잘못 보셨다”고 정색한 뒤, 실은 자신이 민정의 쌍둥이 동생이라고 설명한다. 몇 년 전 출판사에서 자신을 만난 적이 있다는 상원을 마주했을 때는 미묘하게 또 다른 새로운 인물이 되고, 그 자리에서 우연히 재회한 재영은 다시 ‘처음 본 남자’가 된다. 그렇게 배우 이유영의 얼굴을 한 ‘그 여자’는 시퀀스마다 새로운 캐릭터로 재탄생한다.
“저 아세요?” 만나는 남자마다 ‘정말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렇게 묻는 민정의 태도는 의미심장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정색’이 상대방의 마음속 사랑의 불씨를 지피는 데 주효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민정은 정말 일란성쌍둥이 동생이 있을 수도 있고, 재영과 상원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재영과 상원은 애초에 민정을 모르면서 친해질 구실을 만들려고 그를 ‘아는 척’ 하는 건지도 모른다. 세 남녀의 의도와 진실은 까마득하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덕분에 서로 가까워진다.
민정이 재영, 상원과 각각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실없으면서도 천진난만해 마치 막 사춘기에 접어든 어린 연인을 보는 듯하다. 이들은 “내가 아는 여자 중에 가장 예쁘다”거나 “듬성듬성 난 흰머리가 귀엽다”는 둥 서로에 대한 첫인상과 1차원적 정보들만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그렇게 상대방의 즉자(卽自)적 현존(現存)에만 집중하는 이들의 교감은 ‘정보 과잉’ 때문에 다툰 민정과 영수의 관계와 대비되며 관계 속 ‘무지의 힘’을 조명한다.
결국 미스터리의 여자 ‘민정’을 통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로맨스에 대한 인간의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제3자에게서 기인한 소문이나 평판이 당사자 간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이것이 의심을 낳은 뒤 끝내 단정으로 귀결되는 악순환. 영화는 민정과 영수를 통해 ‘객관화된 사적 관계’의 부작용을 부각하고 그 해결책으로 ‘관계의 초기화’라는 솔루션을 제시한다. 연애를 일종의 재테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알아서는 안되고, 더 정확하게는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 “우리가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며 “다 알려고 하지 말라”고 말하는 민정의 입을 빌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 남기는 메시지다. 2016년 11월 1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