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수월했던 초등학교의 학교생활과는 달리, 이 시절 농촌의 가정형편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농사일을 도와야 하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계절마다 달랐다. 봄에는 보리밭매기, 꼴베기가 주된 일과였고, 여름에는 보리타작, 풀베기, 개구리 잡기(닭 모이용)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에는 벼 타작, 과일수확에 손을 보태야만 했고, 추운 겨울에도 땅 뒤집기(뿌리채소인 우엉이나 마를 재배하기 위한 작업), 보리밭 흙덩이 깨기 등에 참여해야 했다. 농가의 필수품이자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먹여 살리기 위한 소죽 끓이기, 땔감 하기, 외양간 두엄 치기, 여물 썰기 등은 연중 내내 해야 하는 일상이었다. 특히 보리나 벼 수확 철이나 모내기철에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농번기가 되어 정신없이 들판을 오가는 농부들의 모습에 공동묘지에 누워 있는 조상들도 벌떡 일어나 일손을 보태야 할 형편이었다. 학교 역시 이맘때면 가정실습이라는 명목으로 며칠간 문을 닫고 어린 학생들로 하여금 농사일을 돕도록 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집에서 노역에 동원되느니 차라리 학교에서 수업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되었다.
보리나 벼 타작 시 겪은 고초는 우리의 가슴에 옹이처럼 박혀 있다. 6월 망종 무렵, 보리가 익기 시작하면 낫으로 이들을 베는 작업부터 고난의 역사는 시작된다. 한여름의 낮볕은 레이저 광선처럼 사정없이 등에 내리 꽂히고, 달구어진 몸에서는 땀이 줄줄 흐른다. 이쯤 되면 마음 약한 우리들의 인내심은 박살 나기 마련이고, 조각난 인내력을 다시 주워 모으는 데 긴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베어진 보리는 논바닥에서 사나흘 정도 말린 후에 손수레에 실어 집 뒤의 마당으로 운반한다.
기온이 떨어져서 다소 시원해지는 밤이 되면 낮에 옮겨놓았던 보리줄기로부터 알맹이를 털어내는 소위 보리타작이 시작된다. 발동기가 시동(始動)하고 피댓줄로부터 동력을 전달받은 탈곡기가 돌아가면 어른들은 그 속으로 보리줄기를 넣기 시작한다. 연약한 아이들에겐 줄기로부터 분리된 보리알을 가마니에 담거나, 알맹이가 떨어져 나간 소위 보릿대를 다른 곳으로 옮겨 쌓는 작업이 주어졌다. 발이 푹푹 빠지는 보릿대 더미 위로 올라가서 한아름씩 안고 온 보릿대를 쌓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동틀 무렵까지 이어진 이 작업에 탈진한 나머지, 산처럼 쌓인 보릿대 더미 위에 누워 있다가 아버지께 혼난 적도 있다.
타작(打作)이란 원래 수확한 농작물을 두드린다는 의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만 하더라도 보리이삭을 도리깨로 두드려서 알맹이를 줄기로부터 분리하였다. 이것은 가장 원시적인 타작방법이었다. 이 작업은 전적으로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기에, 동력용 탈곡기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고된 농사일이다. 다행히도 도리깨질이 고도의 숙련을 요구하기에, 이 일은 어른들의 몫이었고 우리들은 이 노동에서 배제되었다.
더운 여름철에 밤새도록 해야 하는 보리타작이 한 해 농사일 중 가장 힘들었던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보리수확은 열심히 해 봐야 보리밥 먹는다는 심리적 요인도 작용한 것 같다. 오죽했으면 깡통 찬 거지가 보리타작하는 농부를 보고는 아들에게 ‘나도 까딱 잘못했으면 저렇게 될 뻔했다’라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생겨났을까? 시원한 가을철에, 게다가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시작했던 벼 타작은 보리만큼 어렵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당시의 농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농번기에 논밭으로 작업하러 나갈 때의 우리의 심정은 강제수용소의 이반 데니소비치가 추운 시베리아 작업장으로 노역하러 나갈 때의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부모님들의 지난(至難)했던 삶의 궤적에 비하면 우리의 유년기 생활은 안일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껏 뛰놀고 싶었던 우리들에게 농촌에서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성공이라는 열매는 고난과 희생, 인내라는 자양분을 섭취해야 맺어지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농촌 생활이 억새풀같이 팍팍했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섭식(攝食)한 자양분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고난의 세월이라는 샌드백과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 왔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