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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Jul 14. 2023

가난했지만 즐거웠던 유년 시절

   내 기억의 메모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파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대여섯 살 되던 무렵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어렴풋이 잠에서 깬 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시골집에 홀로 남겨진 것을 발견하고는 두려움에 떤 적이 있다. 초겨울의 삭풍에 대나무 가지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귀신들의 아귀다툼 같았고, 감나무 위의 까마귀 울음소리는 악마의 저주처럼 들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포감은 더욱더  커져, 벽지로 바른 신문지 속의 글자가 점점 확대되면서 내 얼굴로 다가오는 듯했다. 들일 나갔던 부모님이 점심때가 되어 대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나는 이 공포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소로우(H. D. Thoreau)의 저서 ‘월든(Walden)’에는 19세기 중반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계 가족의 집을 방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어느 날 그는 호기심에 이끌려 산 너머 새로 정착한 젊은 부부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다. 숲 속의 외딴 오두막의 문을 열자,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가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침입으로 겁에 질린 눈을 동그랗게 떠서 쳐다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외딴집에  나 홀로 남겨진 어린이들의 공포감은 시공을 초월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내 머릿속의 기억들은 다양해지고 또렷해진다. 1960년대 초반, 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가슴에 손수건을 단 코흘리개들이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 일렬로 서서 선생님의 훈시를 듣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 날부터 우리는 학창 시절이라는 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과는 달리 학업에 대한 부담이 거의 없었던 초등학교 생활은 그리 힘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2km쯤 떨어져 있는 읍내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들판을 가로지르고 다리를 건너야 했지만, 동네 친구나 선후배들과 같이 하는 등, 하교 길은 웃음꽃이 피고 이야기꽃이 만발한 행락의 길이었다. 보리 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이면 종달새와 같이 노래하며 들길을 걸었고, 풀피리, 버들피리, 보리피리 등 온갖 종류의 피리를 불며 다녔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코스모스 터널을 통해서 등, 하교하는 호사를 누렸고, 빨갛게 익은 개암이을 찾아 온 산을 헤매기도 했다.

    가난한 서민들이 가장 지내기 힘든 계절은 뭐니 뭐니 해도 겨울이다. 얇은 옥양목으로 만든 옷 사이로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제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얼고 녹기를 반복한 귀불에서는 진물이 흘렀고, 참다못한 아이들은 집에서 기르던 토끼의 가죽으로 귀마개를 만들어 쓰고 다녔다. 방한 기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어린이들은 겨우내 동상에 시달려야 했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발가락 사이에 말린 고추를 끼워 다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겨울방학이 되면 난방과 취사를 위해 산이나 들로 땔감을 하러 다녀야 했다. 민둥산 중턱에 자기 키 만 한 지게를 내려놓고 ‘찰떡을 굴러도 티끌하나 안 붙겠네’며 한탄하던 시절이었다.

    겨울이 춥다지만 우리에게는 이 고난의 계절을 슬기롭게 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추수가 끝난 빈 들판에서 우리는 자칭 유소년 축구 선수로 거듭난다. 25m×80m로 반듯하게 경지정리된 논은 겨울이면 정규 구장 못지않은 크기의 축구장이 되었다. 관중이라곤 한 사람 없고 진흙탕에 발이 푹푹 빠지는 최악의 조건이지만, 이 환경 친화적 운동장은 우리에게 겨우내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해 주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손수 널빤지와 철사로 스케이트나 썰매를 만들어 강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꽁꽁 언 강물은 우리들에게 무상으로, 그리고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스케이트장이 된다. 이마저도 싫증 나면 얼음조각을 잘라 그 위에 비닐포대를 깐 후, 공동묘지 언덕을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이럴 때엔 으스스한 공동묘지는 호화로운 모굴스키장으로 변신한다.   

    여름철의 시골은 우리들의 세상이다. 고무줄같이 늘어나고 불덩이같이 뜨거워진 해 덕분에 하루 종일 야외에서 뛰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계절의 주된 놀이터 역시 마을 옆을 흐르는 강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 보따리(그 시절엔 책을 보자기에 싸서 다녔다)를 팽개치고 곧바로 강으로 향한다. 단순히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고 아버지께 항변하듯 우리의 손에는 소고삐가 쥐여 있다. 그곳에는 이미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 있다. 소를 강둑에 매어 놓고 우리는 언덕에서 몸을 날려 물속으로 첨벙 뛰어든다. 물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강 한가운데서 유유자적 헤엄치던 피라미들이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침입에 놀라 냅다 도망친다. 강바닥 수초들 사이에는 다슬기가 기어 다니고 재첩이 하얀 혀를 내밀고 있다.  

    긴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지면 우리는 싱싱한 풀로 배를 채운 소를 물속으로 끌고 가 목욕을 시키기 시작한다. 엉덩이에 말라붙은 소똥을 씻어내고 풀을 엮어 만든 수세미로 온몸을 닦는다. 작업이 끝나면 장난 삼아 소꼬리를 잡고 강에서 수상스키를 타는 어린이도 볼 수 있다. 커다란 몸집의 소가 물살을 헤치면서 내달리면, 뒤에서 꼬리를 잡은 아이의 몸뚱이가 물 위로 솟구치면서 강물을 가른다.


 

    아궁이 속 보릿대가 타면서 내뿜는 하얀 연기와 구수한 냄새가 온 마을을 뒤덮을 즈음, 아이들은 깨끗이 씻은 소를 앞세우고 집으로 향한다. 간혹 강에서 맨손으로 잡은 물고기가 손에 들려 있거나, 다슬기나 재첩을 옷자락에 담아 집으로 들어설 때면 그의 걸음걸이는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다.  

    나는 시골서 태어나서 유년기의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무척 다행으로 생각하지만,  강변 마을에서 자라난 것에 대해 특히 더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유년기 추억의 대부분이 강가에서 놀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한강이나 낙동강처럼 크지도, 개울이나 실개천과 같이 작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강은 우리에게 다양한 경험과 추억을 선사하여 주었다. 규모가 큰 강은 물장구를 치거나 소를 먹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며, 너무 작은 강(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은 즐길 수 있는 놀이가 한정되어 있다. 주변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봄에는 황어, 가을에는 은어가 수놓던 이 강은 마을 주민들에게도 축복이었다.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강이 밝고 긍정적인 추억만을 선물한 것은 아니다. 장마철엔 강물이 범람하여 주택이 물에 잠기고 농작물이 휩쓸리기도 하였다. 빈번히 발생하는 홍수는 가진 것 없는 서민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시련이었다. 여름철에는 수영미숙으로, 겨울철에는 얼음이 깨지는 사고로 강물에 빠져 죽은 아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건너다 열차사고로 생을 마감하거나, 달리는 기차에서 강물로 투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기차의 화장실에서 낳은 아이를 신문지에 싸서 강물로 던지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요즘은 기차나 비행기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철도청장 혹은 항공사 사장이 평생무료탑승권을 선물하는 시대지만, 당시만 해도 공공장소에서의 출산은 신생아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정도의 수치라는 비도덕적, 상식적 사고가 만연했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강은 우리에게 생명이 자라나고 스러지는 삶과 죽음의 현장이었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생을 체험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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