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신촌부락의 끝자락에 붙어 있는 허름한 농가이었다. 그 집은 2채로 구성되었으며 ㄴ자 형태로 배열되어 있었다. 동향인 본채에는 안방과 건넌방, 방 2개와 부엌이 배치되었고, 남쪽으로 향한 별채에는 사랑방과 외양간, 재래식 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본채와 별채 앞쪽에는 마당이 위치하였고,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가시로 촘촘히 무장한 이 나무는 이방인의 출입을 막는 동시에 악귀를 물리치는 효험이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믿었다. 마당의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심었다는 이 나무는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집안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문은 북쪽으로 나 있었으며, 대문 바로 앞에는 철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집 뒤쪽에는 윗마을로 통하는 신작로가 위치하였고, 그 너머로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논이 끝나는 지점에는 조그만 도랑이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 도랑 뒤의 야산에는 마을 사람들의 사후 세계인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내 마음속의 샹그릴라이자 케렌시아였던 이 집은 이젠 추억 속에만 존재한다. 20여 년 전,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유산이 너무 낡아 헐어버리고 새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넉넉지 못한 농촌 살림살이 속에서 가족구성원들이 겪었던 희로애락도 낡은 오두막과 함께 철거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집안의 산 증인인 감나무도 베어지고 말았다. 하교 후, 홍시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올랐던 감나무에 대한 기억도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갔다. 집 앞을 지나던 철도마저 직•복선화 공사로 인해 먼 곳으로 이설 되었고, 그 자리에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생겨났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귀를 자극하던 날카로운 금속음(金屬音)은 간 곳 없지만, 폐선된 철도부지 위에는 기적소리에 대한 추억만 덩그러니 남았다.
국토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산업화와 도시화는 농촌 풍경마저 급격히 변화시키고 있다.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던 시조의 한 구절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내 삶의 일부였던 사물이나 풍경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집 주위의 다른 환경은 크게 변하지 않아 옛날의 정취를 더듬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해 본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옛 집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대략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이른바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셈이다. 나 역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폭발적으로 숫자가 늘어난 동년배들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 했던 베이비부머의 일원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인생이 꽃길보다는 가시밭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로부터 ‘내가 살아온 인생을 책으로 쓰면 책 몇 권은 쓸 수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게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후대(後代)는 선대(先代) 보다 윤택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대는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과거의 삶이 힘들었다고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송기(松肌, 경상도 사투리로 송구라고 한다)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던 우리 부모 세대나, 해방직후의 혼란과 동족상쟁의 비극을 직접 겪은 형님, 누나 세대에 비하면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고 할지 몰라도, 우리 역시 험난한 인생역정을 걸어온 고행자들이었다.
우리의 유년기였던 1960년대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20달러 정도에 불과했으며, 필리핀이나 가나보다 생활 수준이 낮았다. 이 시대의 가난과 배고픔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아직도 우리 뇌 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여남은 마지기의 농지를 경작하여 중산층 농가로 취급받던 우리 집마저 식량이 부족하여 배곯기가 일쑤였다. 논밭 뙈기에서 생산되는 얼마 되지 않은 벼나 보리들은 생활비에 충당하기 위해 돈사기 바빴다. 밥이라고 하는 것도 대부분 보리쌀이 주재료인 꽁보리밥이었으며, 양도 충분치 않아 숟가락을 놓을 때는 아쉬움이 남곤 했다. 그마저도 부족해 여름에는 국수(그 시절에는 밀을 직접 경작하여 이 식품은 흔한 편이었다), 겨울에는 호박죽이나 뺏대기죽으로 때우기가 일쑤였다. 낮이 길어 배가 더욱 고픈 여름철에 국수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 위가 늘어나는 위하수증에 걸린 적도 있다. 초등학생 때 얻은 이 병은 대학생 시절, 하숙집에서 주어지는 정시 정량의 식사로 극복할 수 있었다.
존 스타인벡(J. Steinbeck)의 소설 <분노의 포도>의 주인공인 톰 조드네 가족은 척박한 오클라호마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풍요의 땅 캘리포니아로 이주한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안고 도착한 그곳은 황금의 엘도라도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도 아니었다. 그 지역 역시 대지주의 노동력 착취가 만연한 또 다른 고통의 땅이었다. 나의 유년 시절에도 이들 가족처럼 생존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대도시로 진출하는 청소년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객지에서 가사 도우미나 화물자동차의 운전조수로 일하면서 보수는커녕, 겨우 숙식을 제공받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현대판 톰 조드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물이나 현상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듯이, 당시의 어려웠던 환경이 우리의 삶에 부정적인 양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다. 고된 시련 속에서 강철처럼 단련된 정신력은 우리의 인생행로에 놓인 웬만한 장애물은 거뜬히 뛰어넘을 수 있는 수단과 용기를 제공해 주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터득한 체험들 또한 미래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실무적 지침이 되었다. 일손이 모자라는 농촌의 현실 속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경험해야 했던 농사일은 언제든지 귀촌하여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 주었다. 원동기나 탁상시계, 재봉틀 등을 손수 분해•조립하면서 터득한 지식은 내연기관 자동차나 다른 기계장치들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전자장치로 무장한 오늘날의 자동차나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손도 쓸 수 없는 문외한이지만.
베이비붐 세대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의 현대 역사에 있어서 고난의 시대와 풍요의 시기를 모두를 겪은 세대라는 점이다. 1970~1980년대의 고도 성장기를 살아온 우리는 1960년대의 암울했던 시절과 1990년대 이후 경제적 번영기를 모두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과도기적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한 세대를 보통 30년으로 간주할 때, 우리의 이전 세대인 부모님들은 고생만 하고 그로 인한 과실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부모님들을 봉양하되 자녀로부터 봉양받지 못한 분들이기도 하다. 반면 1990년대 이후의 세대들은 우리만큼 고생은 하지 않았으면서도 우리보다 더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상황 속에서 나의 삶은 반백년 넘게 이어져 왔다. 지나온 인생을 반추하건대, 기쁘고 보람 있었던 일보다 괴롭고 고달팠던 사건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이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깊이 각인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