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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Jul 22. 2023

행복의 신은 한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반복되는 시골의 일상 속에서, 흑백필름 속의 한 장면 같았던 초등학교 시절도 끝나가고 있었다. 6학년이 되자 중학교 입학시험이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듣기만 해도 혈압이 오르는 시험이라는 제도에 관한 한, 우리 세대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물론, 대학 예비고사, 본고사를 모두 치른 마지막 세대였던 것이다. 심지어 대학시절 응시하였던 공인회계사 시험마저도 오늘날과는 달리 1, 2차 시험 모두를 같은 해에 합격해야만 했다. 우리 세대는 무겁고도 가혹한 시험의 멍에를 지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인 셈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범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우리 역시 보다 수준 높은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입시라는 규범에 순응해야만 했다. 6학년 교실마다 중학교 입시에 대한 중압감이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 마음속의 여유 공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학교 운동장에서 오징어게임을 하는 친구들도 점점 보기 어려워졌다. 이 게임이 훗날 세계적인 놀이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시절이었다. 수험생이 된 우리는 가정에서도 열외로 취급되어 생업 현장에 차출되는 횟수마저 줄어들었다.  

    6학년 초쯤, 학교에서 단체로 주사를 맞은 기억 역시 잊히지 않는다. 왼쪽 팔뚝 안쪽에 맞은 걸로 추측되는데, 당시만 해도 주사는 좀처럼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었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주사가 투베르쿨린 반응(tuberculin reaction) 검사였다. 다음날, 주사 부위가 빨갛게 부풀어 오른 학생 서너 명이 호출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나였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체 운동장 한쪽에 서 있는 조그만 트럭으로 인솔되었다. 내 순서가 되어 트럭 위로 올라가니 옆에 있던 간호사가 커다랗고 하얀 박스같이 생긴 물체를 껴안으라고 했다. 잠시 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드럽고 리드미컬한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숨~을 멈춰라”


    나는 투베르쿨린 반응검사 결과, 결핵균 보균자로 의심되어 결국 흉부 X선 촬영까지 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농촌 사람들은 결핵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내가 결핵에 결렸다는 사실조차도 검사 후 1년 정도 지난 중학교 1학년 시절에 알게 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행로에 있어서 수많은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대한 의사결정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선택한 길이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다른 길에 대한 미련이 남기도 한다. 자기가 선택하지 못한 길에 대한 내면적 아쉬움을 잘 표현한 시가 프로스트(R. Frost)의 ‘가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된다. 훗날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가장 핵심적인 제약조건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이 결핵이라는 병마였다. 내가 이 악마를 만나지 많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는 미련이 남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결핵에 감염된 사실도 모른 채, 초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2학기가 되자 입시에 대한 강박관념은 점점 더 세어지고 있었다. 수시로 치러지는 모의고사 성적에 대한 학급별 경쟁의식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에 위치한 소위 명문중학교에 응시할 학생들은 저녁 9시까지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을 하였다. 점심 도시락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해 쓰라린 배를 움켜쥐고 깜깜한 들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 귀가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반갑지도 않은 불행이 검은 망토를 걸치고 느릿느릿 우리 집 쪽으로 걸어왔다. 가을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찬바람과 함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다음 해 봄까지는 농한기여서 농촌생활에는 다소 여유가 있다. 어른들은 겨우내 구멍가게에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가게의 내실에서 노름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도 이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술자리와 가끔 언쟁이 일어나곤 했으며, 그럴 때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날에는 우리 집도 비상이 걸린다. 아버지는 평소에 탐탁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우리들의 행동에 대해, 술기운을 빌어 꾸중을 하거나 매를 드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11월 중순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하여 들어오신 아버지는 다짜고짜 식구들을 집밖으로 내쫓았다. 이런 경우에는 일단 사건 현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 잘 알고 있었다. 삭풍이 휘몰아치는 깜깜한 초겨울의 밤하늘 아래에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일단 몸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입시를 앞둔 나는 학교를 그만둘 수 없어 집에 남기로 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한밤중에 산길을 걸어 8km 정도 떨어진 고아원으로 향했다. 외톨이가 된 아버지는 다음날 또다시 술잔을 기울였고,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다시 쫓겨나야 했다. 비록 술을 드셨지만, 입시가 코앞에 닥친 아들의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는지 나에게는 별말씀이 없었다. 아버지와 단둘이서 밥 짓고 빨래하고 가축 돌보아야 하는 고달픈 생활이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홀로 남겨진 아들이 걱정이 되어 어머니는 한밤중에 몰래 집을 방문했다가 고아원으로 돌아가곤 했다. 남겨진 두 사람의 생계를 위해 아버지는 이웃에 반찬을 얻으러 가기도 했으나, 동네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이럴 때면 집에서 기르는 닭을 잡아 끼니를 해결하는 불행 속의 행운을 맛보기도 했다.    

    행복의 신이나 불행의 신은 한 집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법이다. 행복할 때에는 미래에 닥쳐올 불행에 대비해야 하고, 불행할 때에는 이 불운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인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불안과 초초 속에서 보냈던 고난의 시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끝이 났고, 가족들도 재회하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심신이 안정되면 작업에도 능률이 오르는 법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러진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나는 합격할 수 있었고, 우리 학년은 개교 이래 최대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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