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된 후에도 주말이면 농사일을 도와야 하는 농촌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학교생활은 점점 더 익숙해졌고, 그 결과 중학교 첫 학기를 무난히 보낼 수 있었다. 나의 이런 모습마저도 질투가 났는지, 악마는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파우스트를 유혹하여 파멸로 이끄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2학기가 시작되고 가을로 접어든 10월쯤, 기침과 열이 계속되어 아버지와 함께 시내의 내과 의원을 찾았다. 의사는 먼저 청진기로 나의 가슴과 옆구리 등 여러 곳을 진찰하였다. 잠시 후 내 양쪽 어깨를 자세히 관찰하더니 뭔가 확신한 듯,
"BCG 접종을 받지 않았군. 흉부 X선 검사를 하고 내일 결과를 보러 오시죠"
라고 하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결핵균 보균자였던 나는 당시에 공포의 불주사로 알려진 BCG 주사를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날 의사는 우리 부자를 앉혀놓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핵입니다. 주사를 맞고 약도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병원 유리창 너머로 목쉰 듯한 기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병든 사자의 음울한 울음소리 같았다. 결핵에 대해 자세히 몰랐던 나는 이 병이 흔히 이야기하는 폐병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아들의 병이 걱정이 되었는지 아버지는 별말씀이 없었다. 우리는 병원의 문을 무겁게 닫은 후 그곳을 나섰다.
다음날부터 당장 수업이 끝나면 병원에 들러 주사를 맞고, 식사 후 약을 복용하는 일과가 추가되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매일 맞아야 했다. 그 이후로는 일주일에 3회, 2회로 점차 횟수를 줄여 주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경구용 항결핵제로는 아이나(INAH), 파스(PAS) 등을 복용한 것 같다. 주말과 방학 중에는 먼 시내까지 가서 주사만 맞고 오는 일이 너무 번거로워, 한방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동네 어른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엄연한 불법 의료행위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이른 새벽에 주사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일회용 주사기도 없어 매번 주사기를 삶아 소독해야만 했다. 아궁이에서 펄펄 끓인 냄비를 들고 어르신 집 문을 두드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당시는 건강보험이 시행되기 전이라 병원비도 만만치 않았다. 가난한 시골살림에 치료비까지 부담시키게 된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의사는 결핵이라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과로하지 말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여야 한다고 했다. 빈곤한 농촌 출신에다가 장거리 통학까지 해야 하는 나에게 이런 말은 언어적 유희에 불과했다.
그래도 나의 병에 대해 온 가족이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네에서 돼지를 잡을 때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돼지고기를 끊어 오시곤 했다. 무게가 그리 많이 나가지 않는 고기를 대가족 구성원이 골고루 먹기 위해서는 국을 끓이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물 한 양동이와 온갖 푸성귀로 끓여낸 허울 좋은 고깃국이었지만,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음식이었다.
병약한 몸에 양질의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천렵이었다. 집 가까이에 있는 영천강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에서 낚시나 작살을 사용해서 한두 마리씩 물고기를 잡는 감질나는 어로행위는 우리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크기가 매우 큰 족대를 애용했는데, 보통의 족대와는 달리 큰 물 내려오는 도랑에서 사용되는 어구였다. 많은 비로 유속이 빨라진 도랑물 속으로 들어가 족대를 V자 형태로 펼치면, 족대 가운데의 그물이 아래로 휩쓸려 내려가면서 양쪽 정강이에 걸치게 된다. 물살을 따라 내려가던 물고기들이 그물에 걸리면 본능적으로 파닥거리며 상류로 도망치려 한다. 발버둥 치는 물고기가 그물을 툭툭 치는 촉감이 족대잡이의 정강이에 전해지는 순간, 그는 재빨리 족대를 들어 올려 물고기를 일망타진한다. 숙달된 사람은 다리에 전달되는 촉감으로 탁류 속 물고기의 종류까지 알아맞힐 수 있다. 일반적으로 덩치 큰 잉어나 메기가 그물에 걸리면 묵직한 느낌을, 붕어나 피라미 같은 작은 고기는 가볍게 톡톡 치는 감촉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각적 인지현상은 낚시나 투망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족대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많이 사냥했다. 월례고사 시험 전날 저녁 늦게까지 족대질을 한 경우도 있었다. 밤에는 메기들이 많이 잡혔는데, 이 고급어종을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메기들은 떼를 지어 내려오기 때문에, 이들이 그물에 걸리면 무거워서 족대를 들어 올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동안 내 족대와 투망에 운명을 달리 한 물고기가 한 가마니는 넘을 것이다. 비록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한 어족(魚族)들에게 늦게나마 조의를 표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이나 욕망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희생시키지만, 그들도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다른 병원체의 희생양이 되는 생태계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생명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나의 이기적인 노력 덕분인지 기침이나 열은 점점 사라져 갔다. 약을 복용한 지 1년 남짓 지난 시점에 나는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학교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도시의 소위 명문 고등학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설사 성적이 된다 하더라도 경제적, 신체적 한계 때문에 도전을 포기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역 근방에서 제일 잘 나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큰 부담 없이 중학교 3학년을 보낼 수 있었다. 결핵에 관해서는 별다른 증상도 나타나지 않아 약도 끊게 되었다. 의사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투약을 중단하면 잠복하고 있던 결핵균에 내성이 생겨 더 큰 병을 자초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 당시는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