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3학년이 되자, 급우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조나라와의 전투에서 배수진을 친 한신의 기개가 온 교실을 뒤덮고 있었다.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입학시험에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대한민국 고3이면 누구나 치러야 하는 숙명적인 전투. 나도 어느덧 그 전쟁터에 출정한 전사가 되어 있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학교 수업을 한 후, 밤 8시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자율학습을 하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시간적, 체력적 한계로 인해 자전거 이용은 불가능하여 마이크로버스로 통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첫차에 늦을 때면 버스가 마을 앞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곤 했다. 승객이 뜸한 이른 시각에 기사님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에는 공부해야 할 과목이 무척 많았다. 이렇다 보니 공부할 양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문과 학생들도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은 필수였다. 비록 문과반은 이런 과목명 뒤에Ⅰ, 이과반은 Ⅱ라는 숫자가 붙은 교과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모두 다 학습해야 했다. 제2외국어는 물론이고 한문, 고문, 세계사 등도 교과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과목들은 예비고사는 물론, 웬만한 대학 본고사에도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지만, 조급해지고 초조해질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 법이다. 3학년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한 학기가 끝나버렸다. 2학년부터 서서히 피치를 올리다가 3학년 1년 동안 전력을 다하던 당시의 대학입시 전략에 있어서 알토란 같은 시간의 절반이 날아간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실속은 그리 있은 것 같지 않았던 한 학기였다.
2학기를 앞두고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버스 통학시간이라도 아껴야겠다는 마음으로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졸랐다. 본고사까지 5달 정도만 하숙비를 부담하게 되니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앉은뱅이 책상 다리에 각목을 덧대어 세상에 둘도 없는 입식(立式) 책상을 만든 다음, 버스를 이용해서 직접 하숙집까지 날라 주셨다.
하숙집에서의 등교는 시간적, 체력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보다 더 집중적으로 대학입시 전투에 나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생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이번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농촌의 생활습관이 발목을 잡았다. 밤 10시 이후까지 공부해 본 적이 거의 없는 녀석이 그 시간을 넘기려고 발버둥 쳤으나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해 번번이 실패하였다. 오늘날 비만이나 고지혈증 같은 소위 생활습관병이 만연하는 이유는 습관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아침 7시부터 수업이 시작되었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신진대사가 활발한 청소년이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것도 생리학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학습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저녁 시간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심정으로 고안한 방법이 목에 자물쇠 채우기였다. 서부영화의 교수대 밧줄처럼 노끈을 목에 두른 다음, 끝 부분을 자물쇠로 채웠다. 다른 쪽 끝을 천장에 못으로 고정시키면 졸리더라도 누울 수가 없어 밤늦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심산이었다. 졸다가 상체가 숙어지면 목이 졸려 황천길로 갈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잠을 쫓아낼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도 작용하였다. 자물쇠 열쇠는 새벽에 나와 교대하여 공부하기로 한 룸메이트에게 주었다. 노끈을 목에 건 모습이 교수대에 선 악당 같아서 찜찜했지만 잠만 쫓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첫날 저녁,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밤 10시를 간신히 넘겼다. 그 후 나도 모르게 꾸벅거리다가 목이 졸리는 느낌에 놀라 깨기를 몇 번 반복한 것 같다. 11시쯤 되었을까, 책상 위로 올라앉아 벽에 기대어 자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서히 생활습관을 바꾸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갑작스레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통감하면서, 첫 번째 잠 쫓는 전략은 실패하고 말았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아쉬워 곧바로 두 번째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번에는 야외취침이었다. 하숙집 옥상에서 자면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는 단세포적인 사고였다. 옥상 슬래브에 깔개를 깐 후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9월 중순인데도 밤공기는 서늘했다. 한낮의 햇살에 달구어진 콘크리트 바닥의 열기가 몸속으로 전달되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지만 밤하늘의 별을 셀 정도의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다음날 새벽, 오가는 자동차들의 소음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두 번째 작전은 성공한 듯싶었다. 하지만 밤이슬에 이불은 축축이 젖었고 온몸이 찌뿌둥해왔다. 온갖 유해물질로 오염된 밤이슬을 맞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어른들의 말이 실감 나는 새벽이었다.
돌이켜 보면 겨우 두세 시간 정도의 공부시간을 늘리기 위해 이런 무모한 행동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수면을 충분히 취했더라면 학교에서의 13시간을 보다 능률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차후에 일어날 불행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되기도 한다.
옥상과 실내를 오가며 생활한 지 보름쯤 지난 10월 초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체육수업을 끝내고 교실로 들어오니 기침이 간간이 나기 시작했다. 마른기침이나 헛기침과는 달리,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언짢은 기침이었다. 처음에는 감기나 몸살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침은 멎지 않았고, 숨쉬기도 점점 힘들어졌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예전의 내과의원을 찾았다. 의사는 내 증상을 듣고 진료차트를 검토하더니 사무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우선 X-ray 사진을 찍어봐야겠네”
한 시간쯤 후, 의사는 X-ray 필름을 판독기 위에 걸어놓고 이번에는 다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결핵성 늑막염이네. 폐에 물이 차서 빼내야겠군”
영혼이 육체로부터 이탈된 듯이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웃옷을 걷어 올리더니, 의사는 어린아이 팔뚝만 한 주사기로 왼쪽 등을 깊숙이 찔렀다. 잠시 후 그는 노란 액체로 가득 찬 주사기를 나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결핵 주사를 다시 맞고 약도 먹어야 하네”
의식의 맨 밑창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다시 찾아온 병마보다도 당장 눈앞에 닥친 대학시험이 걱정되어 의사에게 물었다.
“대학 시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의사는 다소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이런 몸으로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무리지만, 입시에 합격하더라도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될 걸세”
간신히 몸을 추스른 후 병원 문을 나섰다. 휘황찬란한 도심의 네온사인들이 춤추며 나에게 다가오는 듯했다. 마귀할멈의 망토 같은 어둠이 깊어가는 가을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하숙집에 도착한 나는 이불 위로 내 몸뚱이를 내던졌다. 나는 입시라는 전투에 제대로 참여해 보지도 못하고 후퇴해야 하는 패잔병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