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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Aug 16. 2023

불행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결핵균이 늑막을 제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은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대입 시험을 앞둔 자식이 중병에 걸렸으니 부모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자식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 병에 걸렸다고 수시로 자책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당신의 허파를 떼어 내어 아들에게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으리라. 자신의 가슴을 쪼아 그 피를 굶주린 새끼에게 먹인다는 팰리컨처럼. 이런 상황에서 필답고사에 합격하더라도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한다는 말은 가족에게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아들이 집에서 학교 다니기를 바랐으나, 나는 하숙집에서 다니는 것이 편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등하교의 편의성뿐만 아니라 홀로 아픈 몸을 추슬러 대학 입학시험까지는 버티어 보겠다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다시 투병과 대입이라는 두 가지의 막중한 사명이 내 앞에 주어졌다. 하지만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옛말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망가진 육신은 집중력을 저하시켜 학업능률을 떨어뜨렸고, 체력을 고갈시켜 피로감을 증폭시켰다. 집중력감소와 공부시간의 부족은 곧바로 성적저하로 나타났다. 두 단위 숫자까지 좀처럼 내려가지 않던 모의고사 전교 석차가 세 단위까지 추락하는 허망함을 맛보아야 했다. 너무 무리하게 공부해서 혈색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급우들의 공리공론(空理空論)적 추론은 정신적, 병리학적으로 멍든 나의 가슴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국방부 시계뿐만 아니라 고3교실의 시계 역시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가는 모양이다. 어느덧 11월 예비고사 날이 되었다. 예비고사는 말 그대로 본고사를 치르기 위한 예비시험이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대학 본고사에 응시할 수 없었다. 시험의 당락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지만, 시험성적의 일정비율을 입시에 반영하는 대학이 많아 무시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 예비고사를 보기 위해서는 단체로 기차를 타고 대도시로 간 후, 거기서 1박을 해야 하는 고달픈 여정을 거쳐야 했다. 원정을 위한 여행용 가방을 꾸릴 때 참고서보다 먼저 챙긴 품목이 결핵약이었다.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던 12월, 예비고사 성적이 나왔다. 악조건 속에서 치른 시험치고는 괜찮은 점수였다. 담임 선생님과 상의한 후 S대 교육계열에 지원하기로 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이 계열별로 신입생을 모집한 다음, 2학년 때 학과를 배정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비록 3학년 2학기 모의고사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1학기 성적과 예비고사 점수를 믿었던 것 같다. 당시 고등학교 평가기준이었던 소위 명문대 합격자수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물론 지원한다고 다 합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고사를 열흘 정도 앞둔 1월 중순, 고등학교 졸업식이 열렸다. 본고사에 대한 부담 때문에 다들 졸업식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고교 학력이 없으면 대학입학시험 응시가 불가능하기에, 힘겹게 졸업할 수 있었던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졸업장이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이루어 낸 3년 개근상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졸업장과 상장을 들고 혼자서 쓸쓸히 교문을 나서는 나의 뒤쪽에는 파란만장했던 고등학교 시절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본고사를 앞둔 시점에서는 무엇보다도 피폐해진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병약한 몸에 원기까지 떨어지면 응시조차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체에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틈틈이 책을 들여다봐야만 했다. 타 수험생들과는 달리, 공부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초조감에 일각(一刻)이 삼추(三秋) 같았다. 시험이라는 굴레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픈 심정이었다.

   일 년 중 가장 추운 1월 20일경(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입시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두 번째 여정을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결핵약을 제일 먼저 챙겨야만 했다. 시험 잘 보고 오라는 부모님의 응원을 가슴에 안고 장도에 올랐다. 기차가 집 앞을 지날 때 승강구 계단으로 나오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 앞 철도변에서 손을 흔들고 계셨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불쑥 치솟는 것을 느끼면서 나도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폐선된 집 앞 철도

  

   7시간의 여행 끝에 서울에 도착하여 지인이 잡아 놓은 숙소에 짐을 풀었다.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병원을 찾는 것이었다. 숙소에서 가까운 의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간호사가 위아래를 훑어보면서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결핵 주사 좀 맞으러 왔습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스트렙토마이신 한 병을 끄집어내어 간호사에게 내밀었다. 간호사는 의사와 상의한 후 내 엉덩이에 간단히 주사를 놓아주었다.

   다음날부터 이틀에 걸쳐 시작된 시험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시험을 끝까지 치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내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우려와는 달리 시험은 무사히 끝이 났고, 나는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험 후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당시 합격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응시한 대학교에 직접 찾아가야 했다. 합격여부 확인을 부탁받은 서울의 지인이 발표 당일 전보를 보내왔다. 그 시절의 농촌에서는 전보라는 것이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전보용지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 글자가 적혀 있었다.


   “분발바람. 애석함”


  본고사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그리 크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차라리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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